율곡 이이 업적에 대해 알아봅시다

율곡 이이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율곡 이이의 업적과 함께 율곡 이이의 생은 어떠했는지 간단하게 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일단 율곡 이이 업적에 대해서 먼저 말한다면 임진왜란 직전에 10만 양병 설을 주장한 것이고 붕당정책에서 서인들의 이론에 밑바탕이 되었으면 은병정사(율곡이이가 황해도 해주에 세운 일종의 사립학교)를 세우시는 등 후학을 길러내는데 노력하시고 대공수미법(후에 대동법이 됨) 주장, 군정 개혁(후에 균여법이 됨) 주장, 성학집요 집필(정치적 이론서, 후에 조선 왕의 제왕학 교본이 됨) 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5천권의 주인공인 율곡 이이 사진과 율곡 이이 초상화입니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은 강릉이지만 실제로 고향이라고 칭하는 곳은 파주 밤나무골인데요. 그래서 율곡 이이의 호 역시 밤 골짜기라는 뜻의 율곡입니다.

 


율곡 이이는 19살 때(1554) 가출해서 금강산에서 절에 들어가 불도를 닦았는데요. 승려들은 율곡 이이를 생불이라고 하며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가 불교를 공부했던 사항이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험으로 남겨져 그 부분에 대해서 공격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가 19살에 가출한 이유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돌아가신 충격도 크고 새어머니와 관계가 안 좋아서 가출을 했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절에 계셨습니다.

 


위의 책은 격몽요결이란 책과 금강산 모습입니다.

율곡 이이의 업적 중에 하나인 9번 장원 급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당시 과거 시험은 1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번 계속 합격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험을 계속 보다 보니까 9번 장원급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율곡 이이가 처음 장원급제를 시작한 것은 21세로 소과 초시라는 시험입니다. 율곡 이이 업적 중에 하나는 격몽요결이라는 초학자들을 위한 공부법을 안내하는 책을 쓴 것인데요. 격몽요결의 간단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입지(立志): 분명하게 뜻을 세워라.

2. 혁구습(革舊習): 잘못된 옛 습관을 타파하라.

3. 지신(持身): 몸가짐을 바로 하여 정진하라.

격몽요결에는 공부라는 것이 진리탐구에 중점을 둬야 하는지 출세에 중점을 둬야 하는지의 갈림길에서 진리탐구에 중점을 둔 내용들입니다. 율곡 이이는 진리탐구에 공부의 중점을 뒀는데요. 우리 집이 어려워서 과거를 본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율곡이이의 업적 중에 대공수미법을 주장한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방식을 사용했는데요. 이게 잘 맞지 않아 율곡 이이 표현을 빌리자면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가져오고 바다에서 배를 타고 멧돼지를 잡아오라는 형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깔끔하게 공납은 그냥 다 쌀로 납부하는 방식을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율곡 이이의 업적은 군정개혁과 인재의 고른 등용을 주장한 것입니다. 서얼 같은 경우에도 능력이 있으면 거기에 맞게 벼슬을 주고 노비를 면천하여 군사 수를 늘리자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왕은 선조로 선조는 조선시대 왕중 탑급으로 무능했던 왕입니다. 율곡 이이의 개혁 정책들은 선조가 실행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율곡 이이는 건강도 안 좋고 조선시대를 개혁하기도 힘들 것 같아 벼슬을 관두게 되는데요. 율곡 이이가 벼슬을 관두면 몇 년 있다가 선조가 다시 불러 벼슬을 하게 되고요 다시 관직을 관두면 또다시 조금 있다가 선조가 불러 벼슬을 하게 되는 순환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율곡 이이가 벼슬을 관둘 때는 선조 기분이 나쁠 정도의 직언도 하게 되는데요 그래도 선조는 율곡 이이가 능력을 뛰어남을 알고 계속 부르고 이조판서 같은 높은 지위까지 계속 줍니다.

 


위의 동상은 율곡이이 선생이시고요 아래 그림은 임진왜란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 설은 율곡 이이가 죽고 난 후 제자들의 행장이나 연보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말이 많은데요. 10만이라는 말은 김장생이 쓴 율곡전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10만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율곡 이이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궁정 개혁을 제시한 것은 맞고요 율곡 이이가 제시했던 군사 관련 정책들이 임진왜란 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1583년 선조가 율곡 이이를 불러 궁궐에 가다가 현기증이 일어나 율곡 이이는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사항 때문에 왕을 기만한 것이라고 공격이 들어오고 상소도 엄청나게 선조한테 들어갔는데요. 선조로써는 드물게 올바른 판단을 하여 율곡 이이를 보호해주고 맹공격을 하던 신하들을 귀양 보내기도 합니다.

 

율곡 이이는 이조 판서를 맡은 지 4개월 만에(15841)에 돌아가십니다. 율곡 이이가 돌아가셨을 때 집이 가난해 장례비용을 친구들이 댔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가 청렴하게 살아서 돈이 많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후학을 양성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집이 가난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가 살았을 시기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지는 붕당정치의 시작 시기인데요. 당시 율곡 이이는 중립을 주장했으나 내용면에서 서인쪽 내용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 율곡 이이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저렇게 뛰어나신 분이 건강이 안좋았던게 너무 아쉽습니다. 왕도 하필 조선시대 탑급으로 무능했던 선조인 것도 아쉽고요 자신의 뛰어남을 아시고 책과 후학을 양성해 주신 율곡 이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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