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에 대해 알아봅시다

소현세자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소현세자 는 인조의 아들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청나라에 패배해 인질로 소현세자 를 청나라로 데려갑니다. 소현세자 는 인질인 채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에서 볼모로 있으면서 청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서양의 진보한 문물들을 접하고 이것을 조선에 전파하겠다는 생각도 가진 인물입니다. 드라마 추노가 소현세자 의 시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1612년 소현세자는 인조의 큰아들로 출생합니다. 1623년 소현은 세자로 책봉됩니다.

병자호란에서 인조는 청나라에 패해 청나라 황제 앞에 직접 가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항복 조항 중 하나인 세자를 인질로 청나라에 보낸다는 약속을 지킵니다. 그래서 1637년 소현세자는 볼모가 되어 아내 강빈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갑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인조와 소현세자 관계는 좋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인조가 소현세자가 추위에 약하니 온돌방에서 재워달라고 청나라 사령관에게 부탁할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로 끌려가는 동안 소현세자는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보통 길바닥에서 천막을 치고 잤다고 합니다.

 

심양일기 라고 소현세자의 일정을 기록한 세자 동궁일기의 일부로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있었던 기간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소현세자 는 세자니까 심양에서 조선 외교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세자의 재량권이 많지 않습니다. 별로 없는 수준인데요. 청나라에서는 조선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면 소현세자한테 와서 압박을 해 소현세자 스트레스가 많이 심했다고 합니다. 청나라 눈치도 봐야하고, 조선 눈치도 봐야 하는 샌드위치로 낀 상태라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소현세자 에게 식량 공급을 중단하는데요. 그래서 소현세자가 청나라 농지 일부를 사 농사를 시작하였고 필요량의 3배 이상을 수확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는 당시 청나라에 피로인이라고 해서 조선사람들이 병자호란에 진후 포로로 많이 끌려왔었는데요. 이런 피로인들을 돈을 주고 구입해 자유를 주면서 같이 농사를 짓게도 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은 청나라와 조선의 무역을 이으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고 합니다. 청나라는 명과 전쟁 중이라 마땅히 무역할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이때 강빈이 조선과의 무역을 중개해주니 많이 이용하였고 강빈도 그 과정에서 부를 막대하게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인조실록 “재물을 늘려 잡혀간 우리나라의 남녀를 상환한 것이 수백이나 달했다.”

 

그러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소현세자 도 청나라 왕실을 따라 북경으로 이동합니다. 이 북경에서 1644년 아담샬을 만납니다. 아담샬은 당시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로써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독일 사람입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천주교와 서양과학을 배웁니다.

 

 

정교봉포 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순치원년(1644년) “조선 국왕 이종(인조)의 세자가 북경에 인질로 와서 아담 샬의 명성을 듣고 자주 천주당에 왔다.”

 

아담샬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과학자였는데요. 아담샬의 회고록 중 소현세자 편지의 내용입니다. “제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 이것들을 궁으로 갖고 갈 뿐 아니라 인쇄하고 복사해서 선비들에게 널리 알리겠습니다. 선비들은 마치 사막에 살다가 학문의 전당으로 옮겨 가는 양 기뻐할 것입니다”

 

1645년 8년만에 귀국, 그리고 두 달 후 사망합니다. 소현세자 는 귀국할 때 청나라 황제가 준 벼루나, 각종 과학기기와 서책들을 가지고 왔는데요. 인조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준 벼루를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던 질정도 였습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인조는 친명 정신으로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된 사람인데요. 친명배금이 자신이 왕이 된 이유입니다. 근데 청나라 문물을 가져오고, 배울점이 많다고 하는 소현세자가 마음에 안 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 기본 사상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또 소현세자의 장인이 척화파로써 인조에 물의를 주는 세력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으나 귀국후 두 달 만에 죽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1645년 6월 27일 “온 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그 얼굴 빛을 분변 할 수 없어서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독살설을 의심하게 하는 기록인데요. 독살이거나 소현세자가 아프다 보니까 당시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많이 받았는데요. 의원이 치료를 잘못했을 수도 있는 기록입니다.

 

소현세자가 죽은후 원래대로라면 소현세자 자식들 중에서 다음 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인조가 소현세자 동생을 세자로 지목합니다. 이런 부분이 억울하여 소현세자 아내인 강빈이 머리를 헝클고 인조한테 가져 따졌는데요. 이런 이유로 1646년 소현세자 부인 강빈이 인조에 의해 사약을 먹고 죽습니다.

 

또 소현세자 자식들을 다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는데요. 1638년 소현세자의 세아들 중 두 아들이 제주에서 유배 중 사망합니다.

 

이후 인조는 단 한번도 소현세자 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상 소현세자 관련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인조는 선조와 맞먹는 무능한 왕인듯합니다. 조선을 개혁하고 부흥으로 이끌 사람들은 다 죽이면서 나라는 계속 수렁으로 빠트리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인조는 선조와 함께 조선 최고의 무능한 왕이 아닌가 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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