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박문수 에 대해 알아봅시다

암행어사 박문수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암행어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사하는 역할을 했는데요. 박문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박문수는 영조시대에 활약한 암행어사인데요.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많은 백성들에게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 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암행어사의 트레이드 마크 마패(위 사진)와, 실제로 암행어사인 것을 밝혀주는 어사 임명장인 봉서 사진(아래 사진)입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를 포함한 모든 암행어사 가 업무를 위해 자기 신분을 밝히는 일을 보통 출도(出道)라고 하는데요. 가끔씩 출두(出頭)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역시 과거급제로 관리가 되신 분입니다. 33살이라는 지금으로 봐도 약간 늦은 나이에 과거급제하셨는데요. 암행어사 박문수 가 과거시험 보러 갈 때 어머니께서 “용한 절에 가서 기도해라, 가면서 찹쌀 유과를 먹어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가 바로 과거시험 보러 가기 전에 기도한 절이 안성에 칠장사 란곳인데요. 지금도 수험생들 학부모님들이 그 절가서 많이들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또 암행어사 박문수 가 먹었던 찹쌀 유과에서 시작해 현재도 합격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찹쌀떡을 먹는 풍습이 생겼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은 구휼 기록(백성을 구제했다는 기록)들이 있는데요. 그중에서 암행어사 박문수 관련 기록은 구전설화로 전해지는데요. 한국 구비문학 대계라는 각 지역별 구전되는 구비문학을 집대성한 연구 총서에는 암행어사 박문수 관련 기록이 97건으로 제일 많은 구전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2위가 오성 이항복과, 퇴계 이황 관련 구휼 기록이 20~30건 정도이니 암행어사 박문수 관련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가 출도를 할 때 보통 마패를 보여주는데요. 마패를 보여주면서 자기가 암행어사인 것을 밝히지요. 하지만 실제로 마패는 암행어사인 것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니라 조선 관리들이 출장 같은 것을 갈 때 역에서 말을 빌릴 수 있는 이용권이었습니다. 그래서 꼭 암행어사가 아니고 일반적인 관리라 하더라도 마패가 있었습니다.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만큼 말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같은 암행어사들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물건으로는 왕이 직접 내려주는 어사 임명장 같은 공문서(봉서라고 함)가 있었습니다. 종이에 암행어사라고 적혀있는 거지요. 또 유척이라고 놋쇠로 만든 자도 같이 가지고 다녔는데요. 자를 이용해 도량은 잘 지키고 있는지, 규칙대로 물건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지 체크를 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암행어사 박문수’ 라고 되어 있지 않고 ‘어사 박문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1727년 9월 25일 영조실록 “영남의 흉년도 호남과 다름없으니.... 백성을 안집 시키기 위해 박문수를 어사로 천거하니...”

 

위의 내용이 이후에도 몇 차례 어사로 활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사(御史)는 왕명을 받아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러 파견되는 관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되는 어사를 암행어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조 때는 일반 어사도 암행 활동을 겸했는데요. 일반 어사의 암행 어사화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어사냐 암행어사냐를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섞어 사용해도 되는 용어입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는 1723년 소론 출신으로 33세 나이에 과거급제를 하였습니다. 그 후 5년 만에 종 2품 경상도 관찰관에 임명되는데요. 요즘으로 치면 7급으로 시작해 5년 만에 차관이 되는 정도입니다. 상당히 고속승진을 하는데요.

 

 

그 배경에는 영조가 왕세제 일 때 공부했던 교육기관인 세제시강원에서 암행어사 박문수가 교육관으로 있어서 영조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요. 그 인연으로 영조는 암행어사 박문수를 굉장히 좋게 보아서 고속 승진이 가능했습니다.

 

또 1728년 영조에 반대하는 무신란이 일어나는데요. 그때도 암행어사 박문수 가 토벌군으로 참전해 공을 세움으로써 영조의 남자라고 부를 정도로 친 탕평파 혹은 친 영조파가 되어 고속승진을 하였습니다.

 

당시 소금 생산은 많은 노동력이 들어감으로써 많은 이익을 냈지만 그 이익은 모두 왕실 가계로 들어갔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는 이런 것을 영조에게 건의하여 소금을 생산하고 그 이익을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또 당시는 16세 이상 60세 이하 남성이 군대에 가지 않으려면 1년에 2 필씩 군포를 내야 했습니다. 군포 1 필의(베) 폭은 약 37.4cm이고요. 길이는 16m에 달하는 천을 2개씩 매년 내야 했습니다. 집에 아들 2명만 있고, 이웃이 도망가면 그 몫까지 자기가 내야 하는데요. 그렇게 아버지, 할아버지, 아들 2, 도망간 이웃 1명 하면 1년에 총 10 필의 군포를 내야 하는데요. 베 1 필 짜는데 10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10 필이면 100일 동안 계속 군포만 짜야하는 것입니다. 1년이 365일인데요. 그중 100일은 그냥 세금 내느냐 공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이런 것을 암행어사 박문수 가 1년에 1 필로 줄이고, 양반도 세금을 내게 하자고 건의를 하는데요. 양반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양반들에게 군포를 내는 것은 실패하고요. 백성들의 군포만 1년에 1 필씩 내는 균역법을 성공시켰습니다. 국가는 세금이 줄어드는 만큼 다른 방식을 사용해 모자라는 세금은 충당했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의 재원 보충 대책은 소금 포함 염세, 선박세를 받았고요. 물고기를 잡을 때 내는 어세 등을 이용해 모자란 국가 재정을 보충하였습니다.

 

양반까지 군포를 내는 호포론은 암행어사 박문수 가 처음 주장하여 실패하지만, 100년 후에 흥선대원군이 성공하여 양반도 군역에 따른 세금을 내게 하였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가 죽은 후 백성들은 암행어사 박문수를 ‘문수신’으로 모시며 그 은혜를 갚았습니다.

 

영조가 암행어사 박문수 에게 애정이 있었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1756년 4월 24일 영조실록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박문수)이다. 이제 그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가?”

 

이상 암행어사 박문수 에 대한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정치의 기본이면서 제일 지키기 힘든 게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지요. 이젠 조금만 있으면 총선인데요. 누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며 정치를 할지 잘 판단하셔서 꼭 투표하시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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