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테논 신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봅시다

파르테논 신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요.

어떻게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는지

관련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현재 민주주의의 모태 가된

민주주의가 있던 도시 국가 아테네에 있는

신전입니다.

관련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철기 시대가 시작할 무렵 그리스의 도시 국가

스파르타에는 그리스 최대의 철광석 광산을 보유

하게 됩니다.

 


당시 스파르타의 면적은 7,800km²이지만

페르시아의 제국의 면적은 260,000km²가 넘었는데요.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를 가지러 침공을 하게 됩니다.

 


당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스파르타는 최정예 군사 양성을 하기 위해 사회의

신분계급과 신념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남자들은 7살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18살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스파르타 군인들은 강인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를 상대하기엔 부족했습니다.

페르시아가 너무 큰 제국인 것입니다.

 


당시 스파르타의 숙적 아테네가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농부와 상인 극작가의 작은 도시 국가였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몰려오자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자유를 포기하고 목숨을 구하는 대신 페르시아의

노예국가가 될지 아니면 스파르타와 연합하여 자유를

위해 페르시아와 싸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결정은 시민들의 투표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렇게 싸우는 것에 찬성은 흰돌 그냥 페르시아에

무릎을 꿇는 것은 검은 돌을 놓기로 했는데요.

싸우기로 결정이 나게 됩니다.

지도자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시민들의 뜻을 다수결

의 원칙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런 사상이 현대 민주주의의 모태가 됩니다.

 


강대국 페르시아에 맞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손을

잡고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페르시아 제국 진영에는 제국 전역에서 소집한

10만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은 훨씬 적은 수이지만 당시의

신무기 철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대를 1주일이상

막아내며 선전을 합니다. 그러나 수적으로

3배가 넘은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때 아테네에는 신무기를 활용합니다.

팔랑크스라는 전술입니다.

군사들이 따로 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위로 뭉쳐서 비슷하게 행동하며 같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제왕도 비슷한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팔랑크스 전술로 그리스는 페르시아 군을 물리쳤고

페르시아군은 흩어졌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르도토스는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묻지만

전시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묻는 법이다.

위대한 업적은 큰 위험에서 태어난다.“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 국민들은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건축물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그것이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하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에게 받친 이 신전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됩니다.

우리가 현재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2,500년 전에 아테네에 살았던 소시민들 덕분입니다.

 

이상이에요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후퇴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현대라도 독재가 가능 할 수 있는데요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제도인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킵시다.

파이팅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