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장군 과 이순신 장군의 트러블에 대해 알아봅시다

원균 장군 과 이순신 장군의 트러블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원균 장군 기록은 거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있는 기록과 류성룡의 징비록에 있는 것인데요. 그래서 원균 장군 본인의 생각이 있는 기록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관점에서 혹은 류성룡의 관점에서 원균 장군 기록을 했습니다.

 

 

아래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있는 원균 장군기록입니다.

“1593년 2월 23일 경상 우수사 원균은 흉악하고 음험함”

“1593년 7월 21일 원균의 말이 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음”

“1593년 8월 26일 한산도에서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으므로 매우 해괴하게 여김”

“1596년 3월 12일 원균을 원흉이라고 칭함”

 

 

1593년 2월 23일부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등장한 원균 장군 험담 기록은 4년간 약 30차례 계속됩니다.

 

이 정도로 원균 장군과 이순신 장군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 포함 사람들 대부분이 이순신 장군님을 우리 한민족 역사상 탑클래스의 위인으로 알고 있어서 대부분 이순신 장군님 편을 드실 텐데요.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의미에서 역사학자들이 원균 장군과 이순신 장군 사이가 왜 이렇게 안 좋은지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기록상에는 그것이 한산도 대첩 작전을 짜면서 시작 되었다고 몇몇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유인작전을 펼치자고 했는데요. 원균 장군이 그냥 바로 공격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이 원균 장군에게 “공은 전술을 모르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른 부하 장수들 많은데요. 원균 장군보다 9년 후배인 이순신 장군이 원균 장군 창피를 준건데요. 이때부터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 사이가 껄끄러워진 게 아닌가? 몇몇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위의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 프로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원균 장군이 이순신 장군보다 5살 많습니다. 또 무과 급제도 원균 장군이 9년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고속 승진을 하며 역임한 전라 좌수사가 원래 원균 장군이 갈 자리였다고 합니다. 근데 원균 장군 근무 평점이 안 좋아서 못 갔다고 하는데요. 그 자리를 이순신 장군이 간 것입니다. 저것도 원균 장군이 이순신 장군을 안 좋게 볼 수 있는 한 건더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한산도 대첩 이후 신설된 관직인 삼군 수군 통제사직(종2품)이 있는데요. 원래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이 동급인 전라 좌수사(정3품)와 경상 우수사(정3품)였습니다. 근데 이런 전라 좌수사나 경상 우수사보다 1단계 높은 관직인 삼군 수군통제사에 이순신 장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균은 9년 후배가 상관이 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지금도 검사들 자기보다 후배가 더 높이 올라가면 다 줄사표 내는데 서열이 더 분명하던 조선 시대에는 모욕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은 사이가 안 좋을 상황만 놓였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육지전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수전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그냥 승도 아니고 조선 수군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으면서 왜 수군은 괴멸시키는 대승을 계속 거두었는데요. 그래서 선조가 계속 수군을 바다로 출진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근데 당시 왜가 수전에서 계속 지니까 바다 해안가 지역에 성을 쌓고 성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바다로 나가도 이길 수 있게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런 이유로 선조가 바다에 출진하라고 해도 안 나가고 있었는데요.

 

이때 원균 장군이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수군이 바다 밖에서 공격해 적이 상륙하지 못 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원균 장군은 현재 전장 상황이 아니라 선조 생각에 맞춰서 선조에게 의견을 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게 되고요. 원균 장군이 삼군 수군통제사에 임명됩니다.

 

후에 원균 장군도 이순신 장군과 똑같은 이유로 바다에 출진을 못 하는데요. 권율 장군이 매를 때려서 내보냅니다. 후에 원균 장군은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전투에서 패해 조선 수군 180여 척의 함대 중 12척만 생존하고 다 파괴됩니다. 원균 장군도 육지로 도망가다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칠천량 전투의 패전 이유는 아래입니다.

1. 조선의 판옥선에 불리한 높은 파도

2. 왜성에 있는 일본군에게 드러난 작전

3. 조선군이 휴식을 취할 항구 없음

 

이상 원균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트러블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님이 안 계셨으면 정말 조선의 운명은 매우 암울했을 것입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시는 분 중에 한 분이 이순신 장군님인데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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