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에 대해 알아봅시다

다산초당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다산초당은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입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음력 1801년 11월 9일부터 서울에서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는 것으로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셨는데요. 그중 5년은 강진의 사의재라는 곳에서 생활하십니다.

 

 

위의 장소가 강진에 있는 사의재라는 곳입니다. 조정에서는 정약용 선생님의 귀양살이를 할 곳을 강진이라고만 정해주고, 강진 어디에서 살지는 정해주지 않았는데요. 지방 수령이 어디서 살지 정해주어야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근데 지방 수령이 정약용 선생님이 귀양살이 오는 것을 싫어하고 강진 여기저기에서도 정약용 선생님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강진에서 갈 곳 없이 떠돌던 정약용 선생님을 받아준 주모가 있었는데요. 그 주모 덕으로 위의 사의재라는 주막집에서 정약용 선생님은 귀양살이를 어렵게 시작하였습니다.

 

사의재(四宜齋)는 ‘4가지 마땅함’이란 뜻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하고 정약용 선생님은 유배지에서 많은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요. 답은 4가지를 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4가지는 사의담(생각은 담박하게), 모의장(용모는 엄숙하게), 언의인(말은 적게), 동의중(움직임은 진중하게)입니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집필에 들어갑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모두 초가집인데요. 현대에 와서 복원하면서 관리상의 이유 때문에 기와집으로 지었습니다.

 

 

위의 다산초당 본 건물 제자들을 가르치던 교실 같은 기능을 하던 건물입니다.

 

 

다산초당 동쪽 편에 있는 저 다산동암이란 건물이 정약용 선생님이 거처하던 건물입니다. 이 건물 안에는 1,000여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위의 건물은 다산초당 서쪽 편에 있는 건물인데요. 다산서암이라고 합니다. 정약용 선생님 제자들 숙소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기숙사입니다.

 

 

위의 그림이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초당도라는 그림입니다. 다산초당과 다산동암을 그린 모습입니다.

 

 

그림에서는 초가집인데요. 원래는 모두 초가집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다산 4경이라고 해서 다산초당의 명물 4가지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정석 바위의 정자가 정약용 선생님 정자라고 합니다. 저 정석 바위를 통해 다산초당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다조는 차를 마시는 바위입니다. 저기서 차를 만들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석가산은 연못이 있는 연꽃과 석산이 있는 석가산이 있습니다. 석가산이란 말의 뜻은 돌로 만든 가상의 산이란 말입니다.

 

 

위에 보이시는 것처럼 석가산은 연못에 돌산이 있습니다. 저 돌은 바닷가에서 주워와 석탑을 쌓은 것입니다.

 

 

위의 누각은 천일각이라는 누각인데요. 나중에 지어진 건물이긴 한데 다산초당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누각입니다. 저기에 가면 정약용 선생님 형이 유배 중인 흑산도로 향해있는 바다가 보입니다.

 

이상 다산초당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컴컴한 밤인 유배 생활 기간 포기하지 않고 집필에 열중해주신 정약용 선생님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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