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에 대해 알아봅시다

헤이그 특사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대한제국이 체결합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가지고 갑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력을 이용해서 일본 같은 강대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있었는데요. 그런 대한제국의 주요 무기인 외교권을 일본이 뺏은 것입니다. 그 후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만국 평화 회의에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하는데요. 그분들이 바로 헤이그 특사입니다. 여기서 이 헤이그 특사 관련 사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헤이그 특사는 총 3분입니다. 위의 사진에 3분이 바로 헤이그 특사입니다. 이름은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이위종, 이상설, 이준입니다.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의 제창으로 개최한 국제회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UN 회의 같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되십니다. 제1차 만국평화회의는 1899년 치루고요. 26개국이 참가합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고요. 1907년 열립니다. 만국평화회의의 목적은 군비 축소, 평화유지책, 전쟁 법규 협의를 위해서 치른 것입니다. 만국평화회의는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된 행사였습니다. 만국평화회의에서만 잘하면 을사늑약도 무효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이그 특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카드였고, 결국 실패하여 고종도 강제 퇴위를 당합니다.

 

오른쪽 헤이그 특사의 이위종 선생은 특사 당시 만 20세로 제일 어렸습니다. 이위종 선생은 조선에서 양반가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이위종 선생의 아버지는 이범진이라는 1896년~1898년 주미공사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일 때문에 미국에서 시간을 같이 보낸 것입니다. 이위종 선생 집안은 대대로 무관입니다. 그래서 15세에 프랑스로 옮겨 간 후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는 창립자가 나폴레옹입니다. 졸업생 중 유명인은 프랑스 18대 대통령인 샤를 드골이 있습니다.

 

이위종은 프랑스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프랑스 상류층과 교류를 합니다. 그러면서 서구 근대사상을 습득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 이범진이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 가 있었는데요. 그래서 아버지 따라 러시아에 갑니다. 샹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옛 수도)에서 이위종은 아버지를 도와 러시아 외교를 같이합니다. 당시 이위종은 러시아어도 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됐습니다.

 

실제로 이위종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했습니다. 당시 세계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습니다. 이위종이 프랑스어도 잘하니까 아버지 외교에 도움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세계에 나가 있던 외교관들을 대한제국이 전부 고국으로 소환합니다. 이때 이범진 이위종 부자는 소환 명령을 거부하며 러시아에 남아 외교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때 자칭 대한제국 특사라고 했습니다.

 

이위종은 1905년 11월에 18세로 결혼을 하는데요. 신부 이름은 엘리자베타 발레리야노브나 놀켄입니다. 부인은 스웨덴 외교관의 후손인 러시아인입니다. 이위종은 이 결혼을 위해 러시아 정교로 개종도 합니다. 신혼의 단꿈이 깨지기도 전에 헤이그로 간 것입니다.

 

가운데의 이상설 선생은 특사 당시 만 37세였습니다. 법부협판 의정부참찬을 역임하셨는데요. 쉽게 이야기하면 고위 관료셨습니다. 그래서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셨습니다. 이상설의 어릴 적 이름은 ‘복남’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도 일찍 세상을 뜨셨습니다. 이상설은 소년 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14살에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한성으로 옵니다. 그런데 이상설은 요즘 말하는 수재나 천재셨습니다. 신동이라고도 하는 부류였습니다.

 

이상설은 신학문과 구학문을 아우르는 천재였습니다. 이상설은 1894년 24세로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에 급제합니다. 과거급제 2년 후 성균관 관장으로 임명됩니다. 당시 근대학문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역할들을 하셨습니다. 대한제국 최초의 근데 수학 교재인 산술신서, 수리를 저술했습니다.

 

이상설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상소를 5번 올립니다. 그 내용 일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라가 망할 지경이니 정녕 사직을 따라 죽을 결심으로 순사의 뜻을 세우소서 신의 말이 그르다 하시거든 신을 베어서 적들에게 주시고 신의 말이 옳다 하시거든 적들을 베어서 국민에게 주십시오”

 

 

1906년에 들어서서 이상설 선생은 북간도 지역, 현재의 연변이라고 하는 곳으로 망명하러 가십니다.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이라고 하는 근대학문을 가르치는 신학문 민족교육 기관을 설립합니다. 이 학교에서는 역사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 국제법 같은 근대학문들을 가르쳤습니다. 서전서숙은 국외지역 항일 민족교육의 효시입니다.

 

왼쪽의 이준 열사는 특사 당시 만 48세이십니다. 헤이그 특사 목표를 이루지 못해 화병으로(사망원인 추측) 네덜란드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아니라 열사로 불리십니다. 대한제국 1호 검사입니다.

 

이준 열사는 1896년 37세의 나이로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이 됩니다. 신하들의 불법과 비리를 파헤치다가 취임 1개월 만에 검사보에서 면직을 당합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망명을 갑니다. 2년간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대한제국으로 귀국합니다. 1906년 대한제국의 사법기관인 평리원 검사가 됩니다. 그래서 10년 만에 다시 복직하는데요.

 

이준은 10년 만에 검사에 복직하고 1년 만에 자신의 상관을 처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이준은 을사오적 암살 미수범들의 사면을 추진하고 있었는데요. 평리원 상급자들이 전부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실패했는데요. 이준은 이런 이유로 사면에 반대한 상관들을 고소한 것입니다.

 

현재도 한국에서 네덜란드 헤이그를 가려면 비행기 타고 약 13시간은 가야 합니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할 당시 대한제국 영토 안에 있던 사람은 이준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준만 대한제국 영토에서 출발하고요. 나머지 이상설과 이위종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는 중에 중간에서 만나 같이 갑니다.

 

이준이 한성에서 출발한 날은 1907년 4월 22일이고요. 부산을 거쳐 배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요. 1906년 북간도로 망명을 했던 이상설은 1907년 4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과 합류를 합니다. 이 둘은 1904년에 완공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네덜란드로 갑니다. 1907년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러시아 수도)에 도착하는데요. 거기서 이위종이 합류하여 3명이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간 것입니다.

 

 

이준이 4월에 한성에서 출발하여 네덜란드에 도착한 것이 6월인데요. 꼬박 2달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위의 문서는 헤이그 특사 임명 문서 사본입니다.

헤이그 특사는 고종이 보냈다는 확실한 증거물이 없습니다. 가는 데만 2달이 걸리는 여정의 비용을 댈만한 사람이 고종 이외에는 별로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요. 헤이그 특사 임명 문서 사본은 있는데 원본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종이 보낸 거 맞는 거 같긴 한데 확신하지는 못하는 상황입니다.

 

 

위의 사진은 미국인 헐버트 모습(미국인 선교사로 1863~1949년)입니다. 제4의 헤이그 특사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일본도 대한제국이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서 무언가 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시한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미국인 헐버트입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86년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에 영어교사로 대한제국에 옵니다. 그 후 고종이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하자 자신이 고종 잘 때 불침번을 서주는 등의 행동으로 고종의 신임을 받던 인물입니다. 또 미국인이라 일본도 함부로 못 했는데요. 이런 헐버트가 무언가 할 것이라 생각하고 일본은 헤이그 특사가 아니라 헐버트를 밀착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헐버트 덕분에 헤이그 특사는 일본의 특별한 방해 공작 없이 무사히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헐버트 역시 고종의 밀명을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는데요. 가면서 유럽 여러 나라를 들르면서 그 나라의 언론관계자들과 사전에 대한제국의 특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또 고종의 친서를 미국, 프랑스, 독일 같은 9개국 원수들에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제2차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0일 날 개최하는데요. 일본도 참석합니다. 당시 일본 대표단인 전권 위원단의 제1 목표가 대한제국의 밀사단 참석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전권 위원단의 조처는 아래입니다.

1. 열강들에게 헤이그 특사의 의견을 수용하지 말 것을 요청

2. 일본 기자를 헤이그 특사의 숙소에 보내 감시

 

실제로 당시 일본 대표단은 과로사 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전력을 당해 헤이그 특사를 방어했습니다.

 

헤이그 특사의 활동은 아래입니다.

1. 1907년 6월 25일 헤이그 도착

2. 6월 27일 일본 제외, 각국 탄원서 발송

3. 6월 29일 의장 넬리도프 면담 요청

4. 6월 30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 지원 호소 만국평화회의보 보도

 

인데요.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2, 3, 4 모두 실패합니다.

 

 

위의 문서는 왼쪽이 1906년 발행한 만국평화회의 초청국가 명단에는 코레아가 있었는데요. 1907년 발행한 오른쪽의 좌석 배치도에는 코레아가 빠졌습니다. 1년 사이 일본이 외교술로 코레아를 뺀 것입니다. 2차 만국평화회의는 원래 1906년에 열릴 예정이었는데요. 여러 사정 때문에 1907년으로 연기된 것입니다. 그 1년 동안 일본이 외교적으로 코레아를 뺏습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 중 러시아와 일본이 비밀 협약을 맺는데요.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갖는 권리를 인정해주고, 그 대신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골 특수 이익을 보장하는 비밀 협약을 맺습니다.

 

일본은 군사력과 협박으로 대한제국을 손에 넣은 것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여러 강대국과 접촉하며 대한제국 소유권을 인정받은 상황입니다.

 

헤이그 특사가 실패하자,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보낸 이유로 일본에 의해 폐위되고 일본은 순종을 왕에 앉힙니다. 그 후 순종을 협박해서 이상설에게는 교수형을 내리고요.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을 내립니다. 그래서 헤이그 특사 3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 땅을 못 밟으셨습니다.

 

이준은 네덜란드에서 화병 추측으로 사망하시고요. 그래서 열사라 호칭합니다.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하여 땅을 구입하여 한국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듭니다. 마을 이름은 한흥동(한국이 흥하다 란 뜻입니다.)입니다. 거기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십니다. 1917년 시베리아에서 생을 마감하십니다.

 

이위종은 헤이그 특사 후 행방이 묘연한데요.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당원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이 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군사학교에 입학한 것까지는 기록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2년간 소위보로 복무하고요.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재정러시아군 장교(황제의 군대)에서 소비에트 군(혁명군)으로 전향을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상 헤이그 특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어렸을 땐 죽을 때는 좋게 죽고 싶었는데요. 나이가 들수록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내일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오늘 나에게 떳떳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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