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광복회 에 대해 알아봅시다

대한 광복회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대한 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결성한 무장 독립운동단체인데요. 박상진 의사가 만들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광복회인 1965년에 조직한 독립유공자와 유족 후손이 만든 보훈단체와는 다른 곳입니다.

 

 

위의 분이 박상진 의사이십니다.

박상진의 아버지인 박시규는 고종 22년 문과에 급제하였고요. 승정원 승지(현재 청와대 비서관급)를 하셨습니다. 큰아버지인 박시룡한테 나중에 박상진 의사가 양자로 가는데요. 박시룡은 홍문관 교리를 지내신 분입니다.

 

 

경주 최부자 집은 12대가 만석꾼이던 집안인데요. 그 집안의 모토가 “동네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였습니다. 잘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박상진 의사의 아내가 경주 최부자 집 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권력 + 재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집안만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박상진 의사 자체도 수재셨는데요. 1905년 설립한 사립 법학 전문학교인 양정의숙에서 법을 전공해서 공부하시고요. 1910년 봄에 어려운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대한민국 1호 판사가 되셨습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하는데, 온 힘을 쏟아부은 것입니다. 판사도 사퇴하셨습니다.

 

 

위의 분이 박상진 의사 스승인 허위 장군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스승이 바로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친 허위 장군이셨습니다. 허위 장군은 서대문형무소의 1호 사형수였습니다. 허위는 1855년~1908년 사람으로 조선 말기 의병장입니다. 서울 진공 작전의 대장이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가 허위 장군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판사직을 사임하고 1911년에 중국 상해에 방문합니다. 세계정세도 돌아보고, 독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마침 당시 상해는 신해혁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신해혁명은 1911년 중국의 공화 혁명을 위해 전제 군주제 타도, 중화민국을 건설한 운동입니다.

 

거기서 박상진 의사는 민중들의 힘으로 전체 군주제를 타도하고 민중들의 나라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래서 민중 + 혁명의 두 개 개념을 가지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세웠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신해혁명을 이끈 중국의 정치가 쑨원을 직접 만나서 면담하기도 했고요. 중국 동북부 군벌인 장쭤린과도 만났습니다.

 

이것을 통해 박상진 의사는 독립운동 노선을 세우는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O 자금 마련 후 혁명 운동의 근거지 생성

O 무기 비축, 독립군 양성

O 무력 봉기로 일제 타도

 

위의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바로 대한 광복회입니다. 1915년에 창설했습니다.

 

 

위의 그림이 대한 광복회 조직도인데요. 군대 같은 형태의 조직도를 가졌습니다. 저렇게 지휘부가 있고요. 지역마다 지역 조직이 있습니다. 이진용 부사령이 체포되자 청산리 대첩으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부사령이 되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이 만주에서 청산리 대첩을 하도록 파견한 것도 박상진 의사입니다.

 

 

대한 독립회는 군자금 혹은 활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본이 걷은 세금 마차를 탈취해서 돈을 빼앗거나, 친일을 많이 하는 지주들에게 강제로 돈을 빼앗는 방식으로 자금을 모았습니다. 지주들에게 미리 얼마를 달라고 통보를 하고 나중에 들러서 받았다고 합니다. 자금 주는 것을 거부하는 지주는 죽였습니다.

 

 

위의 목록 같은데요. 자금을 주지 않은 부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한 광복회가 자금을 모으면 독립군 훈련을 하는 곳이나 전투를 하는 곳으로 자금을 보내야 하는데요. 자금 순환을 원활히 하기 위해 상회를 설립하여 자금을 회전시켰습니다.

 

 

위의 그림 같은데요. 한반도 전 지역과 만주지역까지 상회를 만들어서 겉보기엔 장사하는 것처럼 보여 일본의 견제를 피하며, 자금을 회전시켰습니다.

 

상회뿐만 아니라 여관도 만들어서 운영했는데요. 독립운동 관련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여관을 운영하며 거기서 독립운동가 관련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런 대표적 여관이 안동여관입니다.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도 대한 광복회와 연결고리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김원봉은 고모부인 황상규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데요. 이 황상규가 바로 대한 광복회 창단 멤버입니다. 실제로 의열단 노선과 대한 광복회 노선이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1918년 2월 1일 일본에 체포되고요. 1919년 2월 28일 사형 선고를 받고, 1921년 8월 11일에 사형이 집행됩니다. 죄목은 보안법 위반, 공갈, 살인, 방화, 강도, 범인장닉, 총포화약류취제령위반입니다.

 

 

위의 신문은 1961년 3월 5일 부산일보인데요. 사진에 할머니가 박상진 의사 아내이십니다. 식량이 떨어져 못 먹어서 얼굴이 부었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박상진 의사 아내는 만석꾼 집안인 최씨 가문 딸이었는데요. 저렇게 후에 힘들게 사시게 된 것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하는 데 써서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독립운동가 출신분들에게 신경을 못 쓴 것은 한국 역사의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친일파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대한 광복회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끝까지 친일파 출신은 처단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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