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독립운동가 에 대해 알아봅시다

박용만 독립운동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두산 그룹의 박용만 회장이 아니라 박용만 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 그룹 회장 하고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은 저마다의 독립운동 노선이 있었는데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외교 노선, 군사 노선, 계몽 노선입니다. 3개 노선 모두 노력하며 같이 발전을 시키는 게 제일 좋았는데요. 당시 좀 모자란 사람은 자기의 노선만이 맞는 길이고 다른 사람의 노선은 틀린 길이라 믿고 그렇게 행동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승만인데요. 진짜 이승만은 쌍욕을 수십 번 해도 모자란 인물입니다. 어쨌든 3가지 독립운동 노선 중 군사 노선으로 노력을 한 인물이 바로 박용만 독립운동가입니다.

 

 

위의 사진이 박용만 독립운동가십니다.

박용만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으셨습니다. 그래서 박용만 숙부님 밑에서 컸는데요. 숙부님이 박용만을 굉장히 아끼신 듯합니다. 박용만 숙부님은 박희병이란 인물인데요.

 

 

박희병은 1895년 일본 국비 유학생 출신입니다. 그래서 1896년에 미국 로어노크 대학에서 2년간 공부를 하는데요. 그때 박용만을 데리고 가서 같이 생활했습니다. 박용만과 함께 유한양행을 세운 고 유일한 회장도 같이 데리고 가서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박용만 독립운동가와 유일한 회장이 막연한 사이입니다.

 

박용만은 이런 환경 탓에 미국 유학 생활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미국 현지 상황을 잘 안 것뿐만 아니라 조선 출신의 개화파 지식인들과도 많은 교류를 했습니다.

 

 

위의 지도가 네브래스카 주의 위치입니다.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학사로 졸업했는데요. 그의 학사 졸업 논문이 ‘아메리카 혁명’입니다. 미국은 영국과 전쟁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독립한 국가입니다. 그래서 조선도 일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여 독립하리라는 탄탄한 이론이 만들어진 상황입니다.

 

박용만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치면 ROTC(간부후보생과정) 과정을 이수합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 예비역 장교로 예편을 합니다. 그러면서 네브래스카 주에서 한인 소년병학교를 건립합니다.

 

한인 소년병학교는 조선이나 만주나 연해주에서 활동하며 전투를 치를 독립군 장교를 육성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학교입니다. 미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근데 군사학교라고 이름 지으면 미국 내에서 거부감이 들 테니까 소년병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학교를 건립하면서 성경도 가르치겠다고 했는데요. 동양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 사항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점수를 잘 얻어 학교 건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인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코리안 스쿨보이라고 불렀는데요. 미국인들이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한인 학생들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한인 소년병학교는 방학에만 운행했습니다. 생도 수는 60여 명입니다. 소년병학교인데 50대분도 계셨습니다. 말만 소년병이고 실제론 독립군 양성소였습니다.

 

 

위의 그림이 한인 소년병학교 일과입니다. 6시에 일어나서 일하고, 군사 훈련받고, 밤에는 공부하는 고된 일과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유한양행 건립 자인 유일한 선생의 어렸을 때 사진입니다. 한인 소년병학교 1회 졸업생 출신입니다.

실제로 한인 소년병학교 출신 중에서 만주와 연해주로 오셔서 독립군 지휘관을 하신 분들도 계시고요. (김장호, 박처후 등) 정한경 같은 미국 박사를 취득하신 분도 계십니다. 우리의 유한양행 건립 자인 유일한 회장도 한인 소년병학교 출신입니다. 유일한 선생은 여명의 눈동자에도 나오는 OSS(오늘날 CIA)에서도 활동하셨습니다.

 

 

박용만 독립운동가는 군사적인 능력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무력을 통해 독립해야 한다는 이론을 책을 집필해가며 탄탄하게 만드셨습니다. 국민개병설이라는 책에는 박용만 선생의 사상이 잘 담겨있습니다.

 

박용만 선생은 그러다 하와이로 활동무대를 옮기셨습니다. 1912년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하와이로 이주하셨습니다. 당시 하와이에는 한인이 5,000여 명 있어서 나름 한인 사회 중에서는 제일 큰 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와이를 선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와이에서만 임시정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간도나 연해주에서도 임시정부 지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실질적인 운영은 각 지부의 자율성에 맞기지만 중앙과 연결되어 있어 소통을 긴밀하게 하는 구상을 하셨습니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국민보라고 하는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는데요. 거기서 주필로서 해외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많은 글을 쓰셨습니다.

 

 

위의 사진은 대조선국민군단 군인들 모습입니다.

박용만 독립운동가는 하와이에서 1914년 6월 대조선국민군단을 창립합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독립운동단체입니다. 국민군단 안에 대조선국민군단 병학교를 설립하는데요. 여기 역시 조선이나 중국 등에서 활동할 군인 장교를 육성하는 곳입니다. 한인 소년병학교와의 차이점은 한인 소년병학교는 방학에만 활동했지만, 대조선국민 군단 병학교는 상시로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생도는 218명 정도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대조선국민군단 병학교 생도의 일과 표인데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농장일, 군사 훈련, 공부를 모두 하며 지냈습니다. 굉장히 힘든 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용만은 1904년 보안회 활동(1904년 설립된 항일운동 단체로서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했습니다.)을 하다가 한성 감옥에 투옥되는데요. 거기서 같이 투옥되었던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박용만이 1913년에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합니다. 박용만은 한인의 교육 활동을 위해 이승만이 필요하다며 불렀는데요. 처음엔 좋았지만 결국 박용만 세력과 이승만 세력을 중심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갈라집니다. 서로 다른 세력끼리 주먹다짐까지 하고 법정에 설 정도로 갈등이 심했습니다.

 

1915년 박용만 지지자인 김종학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장으로 출마를 합니다. 이때 공금횡령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면서 내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김종학을 체포하라고 주장했던 곳이 이승만 지지세력입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정인수를 임시 총회장으로 임명하자고 주장합니다. 김종학은 3개월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납니다. 그러면 수습단계로 가야 하는데 이승만 지지세력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승만 지지세력이 박용만 지지 세력에게 폭력테러를 가하기도 합니다.

 

관련 뉴스는 아래입니다. 신한민보 1915년 6월 24일

“호놀룰루 한인 3백 50명이 (중략) 국민회관에서 의결하고 박용만을 추종하는 파당을 몰수이 죽이기로 작정”

“박용만은 폭동을 피해 시에라 선을 타고 호놀룰루를 떠났도다”

 

얼뜻보면 독립운동 세력관의 세력싸움인데요. 조금 깊게 보면 독립운동 방법론이 다른 세력끼리 주도권 싸움을 한 것입니다. 무장 투쟁도 필요하고, 외교 투쟁도 필요하고, 계몽 투쟁도 필요한데 내 방식이 맞다며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한 것입니다.

 

공금횡령 사건 이전에 이미 박용만과 이승만 사이는 틀어져 있었습니다. 국민회는 교육사업을 위해 마련해 놓은 부지가 있었는데 이승만이 이것을 자신의 명의로 양도해 달라고 요구했고 박용만이 거부해서입니다.

 

위의 사건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권 확보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준정부입니다. 그래서 세금도 걷었는데요. 한인 5,000여 명이 매년 5달러씩 떼는 의무금을 냈습니다. 그리고 상시 35,000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보유 중이었습니다. 이 회비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박용만 세력을 계속 공격했는데요. 한인들 군사 활동을 금지하게 해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합니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 중이라 미국과 일본이 동맹이었는데요. 태평양 지역의 하와이 앞바다를 실질적으로 일본 함대가 하와이를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런 일본 함대를 조선인들이 공격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여 독립군 장교양성을 못 하게 막습니다.

 

이렇게 이승만 특유의 세력 키우기 작전으로 한인사회는 분열되고 와해합니다. 대조선국민 군단은 2년 4개월 유지되다 폐교됩니다.

 

이후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 주택가에서 살해당합니다. 변절자로 오해를 받아서인데요. 박용만이 중국을 이동할 때 일본을 거쳐 갔는데 일본이 잡지 않아서 변절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박용만이 친일을 했다는 증거물은 없습니다. 박용만은 중국으로 온 후 그렇게 같은 독립운동가 이해명에 의해 변절자로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합니다.

 

이상 박용만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한국만 그런가 큰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우리 민족은 많이 모자란듯합니다. 저런 새X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나,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하지 않나,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하지 않나 좀 많이 모자란 것 같은데요. 그래도 지금 같은 경제 대국을 만든 것은 한민족이 저력이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지요. 사람 알아보는 안목만 좀 기르면 한국은 더 잘나갈듯합니다. 한민족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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