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의용대 특수전 부대에 대해 알아봅시다

조선 의용대 특수전 부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조선 의용대는 김원봉이 1938년 세운 항일무장군대입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인정한 최초의 한국인 부대입니다. 그 이전에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서 항일 운동을 하기도 하는데요. 의열단은 폭탄으로 일본 세력을 폭파하는 활동을 주로 했습니다. 의열단의 대표적 사건으로는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김상옥)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나석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황포군관학교 1기 입학생 모습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인데 당시 중국의 최고 엘리트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의열단은 이렇게 초기에는 소수정예로 일본 세력에 폭탄을 투척하는 활동을 하는데요. 하다 보니까 그 한계를 느낍니다. 폭탄을 던져서 일본 사람을 죽여도 금방 새로운 사람이 다시 와서 채워지고, 건물이 부서져도 금방 복구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김원봉이 이거로는 안 되겠다고 느껴서 일본에 대항하는 군대를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조선 의용대입니다.

 

김원봉은 중국의 장제스와 인맥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장제스를 통해 황포군관학교를 입학하고 졸업도 합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의 국부 쑨원이 설립한 최초의 현대식 군사학교인데요. 당시 중국의 엘리트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입니다. 우리로 보면 옛날의 육군사관학교 정도로 보시면 되십니다.

 

당시 일본에 대항하여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했었는데요. 제1차 국공합작(1924년~1927년)이라고 하는데요 그 결과물이 바로 황포군관학교 설립입니다.

 

그때 중국에서는 김원봉이 지명도가 높은 조선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이 일본과 싸워야 하는데 조선인들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활용성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김원봉은 학비 면제 조건으로 학교를 졸업하고요. 바로 초고속 승진을 하여 학교 교관으로 채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중국인 엘리트들과 인맥을 쌓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는데요. 일본이 만주를 정복하기 위해 침략한 것입니다. 그러자 김원봉이 장제스를 찾아가 조선과 중국이 같이 일본에 대항하자며 설득해 조선인 군사학교 설립하는 데 지원을 받기로 약속합니다.

 

그렇게 세운 것이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입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여러 지식을 활용해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합니다.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의 유명 졸업생은 ‘이 육사’가 있습니다. 6개월 과정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의 일과표입니다.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졸업생은 3기생까지 총 125명을 배출합니다.

 

김원봉은 이로써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든 것인데요. 이젠 실질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군대를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마침 제2차 국공합작(1937~1945)이 일어납니다. 중일전쟁 기간 일제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2번째로 연합한 것인데요. 이때 역시 조선도 같이 일본에 대항하겠다며 중국을 설득해 만든 군대가 바로 조선 의용대입니다.

 

 

위의 사진은 1938년 10월 10일 조선 의용대 발대식 사진입니다.

위의 군인들은 대부분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출신이거나 황포군관학교 출신 조선인입니다.

 

 

조선 의용대는 정규군이라기보다는 특수전 부대였습니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선전부대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사기를 떨어트리는 전단을 일본에 배포한다든지, 확성기로 일본 군인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아래는 조선 의용대의 선전 활동입니다.

1. 전단을 돌에 매달아 수류탄처럼 적진에 투척

2. 방패연에 통행증, 선전물을 매달아 적진에 뿌리는 전단 살포

3.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적군에게 확성기로 투항 권고

 

통행증은 이 통행증을 가지고 투항하면 고향까지 갈 수 있는 여비를 주고 보내주겠다는 내용 등이었습니다.

 

조선 의용대는 이런 선전 활동과 함께 첩보 활동도 하고, 돌격 활동도 했습니다.

 

1938년~1940년 2년 만에 조선 의용대는 3배(창립 시 100여 명 -> 후에 300여 명이 돼)로 늘어납니다.

 

일본군은 조선 의용대 대원 한 명당 현상금 500원(현재 가치 6천만 원)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조선 의용대의 이동 경로인데요. 조선 의용대는 초기 중국 무한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다 일본 군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가야 한다는 여론이 있어 일본 군인이 많은 태항산으로 80% 정도의 조선 의용대가 가고요. 나머지는 김원봉을 따라 중국 충칭으로 갑니다. 김원봉이 충칭으로 간 이유는 중국 황금 인맥을 많이 가지고 있어 뒤에서 조선 의용대를 지원 할 사람이 뒤에 필요했고요. 조선 의용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태항산으로 간 조선 의용대는 윤세주가 이끌었는데요. 윤세주는 김원봉과 굉장히 긴밀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갈라진 조선 의용대가 잘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태항산에서 전투 중 윤세주는 아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전사합니다. 그래서 김원봉과 연결고리가 없어져 태항산으로 갔던 조선 의용대와 충칭의 조선 의용대는 갈라집니다.

 

 

위의 그림처럼 타이항산으로 갔던 조선 의용대는 옌안으로 이동하는데요. 거기서 조선 의용대가 아니라 조선 의용군으로 바뀌어 김원봉과 연결이 안 된 단체가 됩니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지휘로 국민당과의 전투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조선 의용군은 북한 국군으로 가서 6.25시 북한 편 군인으로 전투에 선봉으로 동원됩니다.

 

김원봉과 함께 갔던 충칭의 조선 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흡수됩니다. 일본과 최후 결전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이합니다.

 

그 후 김원봉은 남한에 왔으나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고, 미국도 친일파를 관리로 고용하는 덕에 김원봉뿐만 아니라 독립투사 출신들이 남한에서 초기에는 설 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김원봉은 북한에서 자리 잡고요. 북한 장관도 합니다. 그 후 김원봉은 1958년 12월 이후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이상 조선 의용대 특수전 부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저렇게 자기를 희생하며 좋은 일을 하여도 일이 어떻게 꼬일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래서 인생은 노력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많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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