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 의 일본 천황 암살 사건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봉창 의사 의 일본 천황 암살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사람들 도시락 폭탄으로 유명한 윤봉길 의사는 알아도 이봉창 의사는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자식이 있어서 그 후손들이 노력하여 유명해지신 것도 있는데요. 이봉창 의사는 자식이 없을 때 거사를 하셔서 후손이 없어 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윤봉길 의사 집안에서 이봉창 의사를 챙겨주신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사건이 바로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암살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빨간색 원이 사쿠라다몬인데요. 천황이 궁에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일단 이봉창 의사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사쿠라다몬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신 분이 바로 이봉창 의사입니다. 근데 아쉽게도 던진 폭탄은 천황이 탄 마차 뒤쪽으로 떨어져서 터졌는데요. 터지는 폭발력도 작아서 천황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1901년 용산에서 출생했습니다. 집이 가난해 14살 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든 소년 가장이셨는데요. 이분이 일한 곳이 바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이나 약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활 일본어를 습득합니다. 이러면서 일본어가 몸에 배 대충 보고는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성장하셨습니다.

 

1925년 오사카로 이주를 합니다. 일본어를 잘하시니까 대우가 좋은 가스회사에 들어가는데요. 거기서도 일본어를 잘하고 일도 잘하니까 조선인 급료가 아니라 일본인 급료를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 차별은 기본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요.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처럼 급료를 준 것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당시 자신을 신(新) 일본인이라고 칭했습니다.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노력하여 진짜 일본인처럼 살고 싶어 했습니다. 일본의 근대 문물을 흡수하며 살아가는 모던보이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하십니다. 영화, 음악 좋아하고요. 유곽도 드나들고, 술과 노름도 즐기는 지극히 세속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빚에 쪼들릴 때도 있고, 여윳돈으로 저축하거나 본국의 가족에게 송금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봉창 의사는 순수하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행패를 부린다거나 직접 피해를 주는 일은 절대 안 하셨습니다.

 

일본 영감으로 불리셨다고 합니다. 계속 일본 노래만 불러서 얻어진 별명입니다.

어느 날 교토에서 천황이 즉위식을 하는데요. 거기에 가십니다. 자기는 신(新) 일본인으로서 우리 수장을 한번 봬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인드로 가신 것입니다.

 

천황의 즉위식이니까 일제의 경계가 삼엄할 수밖에 없는데요. 거기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들은 경찰들이 다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되십니다. 품에 고향에서 온 한글로 써진 편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봉창 의사 이외에도 많이 잡히는데요. 같이 잡힌 다른 일본인들은 당일 저녁에 풀려납니다. 하지만 이봉창 의사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9일을 유치장에 계십니다.

 

신 일본인으로서 천황을 보러 간 것이지만, 결국 조선인이었던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따돌림을 시작하는 등 전과 같은 생활은 하지 못합니다.

 

1929년에는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비누상점에 취직합니다. 그 후 도쿄로 ‘마쓰이 가즈오’라는 이름으로 이주합니다.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더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려고 한 것입니다. 한국인들과 완전히 교류를 끊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데리고 온 유일한 혈육인 여자 조카도 외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시다 순수한 분이니까 어느 날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 후 나는 한국인으로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고민을 하셨는데요. 내가 이제 독립운동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1931년 1월에 중국 상하이로 가십니다. 곧바로 임시정부 청사에 방문합니다. 당시 이봉창 의사가 임시정부에 갔을 때 소개편지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풍의 말과 행동을 하여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밀정이 아니냐 하는 의심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봉창 의사 과거를 조사했는데 아무런 자료가 없으니까 더 의심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그렇게 의심을 받는 와중에도 계속 임시정부 청사에 들러 같이 술도 마시고, 대화도 하는 등 넉살 좋게 행동을 합니다.

 

아래는 당시 이봉창 의사의 말씀입니다.

왜 당신들은 일왕을 죽이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 있을 때 천황이 자기 눈앞을 지나간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총이나 칼이 있었다면 큰일을 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김구 선생은 오랜 경무국장 활동으로 촉이 있었는데요. 요즘으로 치면 수사관의 수사에 대한 촉입니다. 위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와 진지한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래는 이봉창 의사의 당시 말씀입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 보았습니다.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그 후 김구 선생은 준비하는데요. 하나는 폭탄을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봉창 의사의 상하이->도쿄 교통비 포함 거사까지의 생활비를 모으는 것입니다.

 

폭탄 2개를 마련하고요. 폭탄 1개는 일본 천황 암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자살용입니다.

하와이 애국단에서 지원금 1,000달러를 받습니다.

 

당시로써 1,000달러는 굉장히 큰돈인데요. 이봉창 의사가 임시정부 요원들은 끼니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저렇게 큰돈을 나한테 준다고 감동했다고 합니다. 아래는 관련 말씀입니다.

“정부 기관 집으로 간 즉 직원들이 밥을 못 먹는 것을 보고…. 만일 내가 그 돈을 낭비하고 다시 아니 오면 어찌하시려 했습니까.”

 

 

위의 사진이 이봉창 의사의 거사 전 상하이에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양손에 든 것은 폭탄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12월 17일에 상하이에서 출발하고요. 12월 22일에 도쿄에 도착합니다. 그 후 암호를 김구 선생에게 보내는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아버리겠으니 안심하소서”

1월 8일이 거사 일이라는 메시지입니다.

 

1월 8일 천황이 지나가는 길목을 예상하고 시내로 들어갑니다. 검문을 뚫고 2개의 폭탄을 가지고 갑니다. 검문에 걸리면 미리 준비한 헌병 조장의 명함으로 위기를 탈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천황의 마차 뒤쪽으로 폭탄이 던져지고, 폭탄도 약하게 터져 천황 암살은 실패합니다. 그 후 일본 경찰들이 거기에 있던 사람들 다 잡아가려고 하니까 이봉창 의사가 폭탄은 내가 던진 것이라고 말하여 혼자 끌려갔다고 하십니다.

 

그 후 경찰에서 이봉창 의사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배후를 끝까지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국명에 따라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습니다.

 

1932년 10월 10일 사형을 당하십니다. 당시 32세이십니다.

 

이 사건에 대해 중국언론에서는 아쉽다는 표현을 써가며 반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요. 그래서 중일 간 외교 문제가 비화하여 일본과 중국의 전쟁인 상하이 사변의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이상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암살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숭고하게 목숨을 희생해주신 조상님 정말 감사합니다. 조상님의 은덕을 따라 좋은 일 많이 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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