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선생의 스토리에 대해 알아봅시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스토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한민족은 힘이 없어 우리 문화재를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가치가 있는 것들은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이 외국으로 반출을 했는데요.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이에 맞서 일제 강점기 때 한민족 주요 문화재를 구입해 조선 땅에서 가지고 있는 것에 전념하신 분입니다.

 

 

위의 사진이 간송 전형필 선생 모습입니다. 1906년~1962년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한 한국의 문화재를 사고 보존 하는 일은 재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당시 조선의 40위권에 들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다고 합니다. 배오개 장터 상권(현재의 종로 4가~6가)을 소유하고 계셨고요. 집안사람들이 잇따라 빨리 돌아가셔서 집안의 모든 재산이 간송 전형필 선생에 집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논 4만 마지기 + 밭과 상가 + 미곡상들을 24살이던 전형필 선생에게 모두 상속되었습니다. 이런 재산을 밑바탕으로 문화재 수집가가 된 것입니다. 한 마지기가 논은 200평(약 661m²), 밭은 300평 하는데요. 논 8백만 평(여의도의 10배)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한민족 문화재를 사셔서 문화재 해외 반출을 막으셨습니다. 현재 있는 간송 미술관이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 모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만든 곳인데요. 문화재를 너무 많이 사서 관리하기 어려워 만든 게 간송 미술관이라고 합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특징은 문화재를 팔려고 사람들이 가져오면 싸게 값을 부르더라도 더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제값을 들여 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화재를 비싸게 팔 수 있었는데요. 이런 이유로 더 사람들이 문화재를 전형필 선생에게 팔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림 같은 경우는 열이나 습기는 물론이고 빛만 받아도 변질이 됩니다. 그래서 미술관에 전시한 그림들은 영인본이라고 복사본입니다. 이 영인본 만드는 것도 똑같은 재질로 만들고, 완전히 똑같게 만들어야 해 돈이 많이 든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이 현재 간송 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입니다. 1938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50년 6·25 때는 북한에서 보화각의 정체를 알고 있어서 점령하자마자 보화각으로 문화재 가지러 왔다고 합니다. 당시 전형필 선생은 인근 빈집에서 숨어 있었는데요.

 

모르는 사람들이 미술작품 함부로 손대면 망가질 수 있으니까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직원인 최순우와 서예가 손재형을 데리고 와 미술작품을 챙기라고 했다 합니다. 그때 전형필 선생과 최순우, 손재형 3명이 만나 최대한 시간을 끌자고 작전을 세우고 시간을 엄청 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북한 정부에서 빡쳐서 빨리 가지고 오라고 엄포를 낸 후 다음날 인천상륙작전이 있어서 문화재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 수집가가 되려면 재력도 중요하지만, 물품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도 중요합니다.

 

위의 사진 왼쪽이 고희동, 오른쪽이 오세창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휘문고 재학시절 미술 교사인 고희동(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과 오세창(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의 제자) 이 두 분께 미술작품을 보는 안목을 배우셨습니다.

 

 

아래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 수집한 한민족의 문화재들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해방 후에 문화재 수집보다는 교육사업에 열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젠 문화재를 다른 조선인이 살 것이고 그러면 조선 땅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3.1운동의 중심이던 보성고보를 사서 운영하셨고요. 고고 미술동인회를 결성하여 미술사학자를 육성하셨습니다.

 

이상 간송 전형필 선생의 스토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저런 식으로 민족을 위해 일하셔도 존경스럽습니다. 자기 상황에 맞게 다수의 선을 위하여 걸어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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