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유 독립운동가 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재유 독립운동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일제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하던 노선은 3개가 있었습니다. 민족주의 노선, 사회주의 노선, 아나키즘인데요. 이재유 독립운동가는 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분입니다. 해방 후 이승만이 친일파 척결을 가리기 위하여 반공 정책을 펼쳤는데요. 친일파를 때려잡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자를 때려잡자는 주장을 펼쳐 자신이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가린 것입니다. 그런 움직임으로 인해 아직도 한국에서는 사회주의 노선을 걸은 독립운동가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재유 독립운동가도 바로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이십니다.

 

 

위의 사진이 이재유 독립운동가입니다.

이재유 독립운동가는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이며 지하 혁명 운동 사상 최고의 인물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입니다.

 

 

그 당시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 거기서 사회주의를 접하는데요. 이재유도 똑같이 일본 유학 중에 사회주의를 접합니다. 그리고 여러 좌익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합니다.

 

실제로 이재유는 신간회 동경지부에서도 활동했었고요. 조선공산당, 고려 공산청년회 등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일본에 머무는 3년 동안 무려 70차례 체포를 당합니다. 그만큼 활동을 끊임없이 계속했다고 볼 수도 있고요. 증거 같은 것을 잘 가리는 기술도 특출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도 탈출을 굉장히 잘하셨다고 합니다.

 

일본 법률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법이 바로 치안유지법인데요. 1920~30년대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치안유지법에 엮여서 다 투옥되었던 것입니다. 치안유지법 적용 중요한 대상은 일본 천황제를 부정하는 자입니다. 일본 천황을 부정하는 행동이나 증거가 있으면 다 감옥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1925년~1935년 치안유지법 위반 검거한 조선인만 17,000여 명이고요. 기소된 사람이 5,000여 명(하루에 1.5명)이 넘습니다. 주요 탄압 대상이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이었습니다.

 

이재유도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독립운동가이다 보니 제국주의, 자본주의, 천황제를 비판하는데요. 이런 이유로 치안유지법에 엮여서 계속 감옥에 가고 탄압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탄압이 심하다 보니 1930년대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지하활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점조직 형태로 일을 진행하는 방식 등으로 일을 했습니다.

 

1930년대는 일제의 탄압이 너무 심하다 보니 독립운동의 암흑기라고도 하는데요. 이재유가 이 1930년대에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도 하고,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과 함께 꿋꿋하게 활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1933년 이재유는 3년 6개월 복역 후 출옥을 하는데요. 그 후 서울에서 노동자나 농민을 조직하며 꿋꿋하게 독립운동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경성(서울)의 주요 공장이나 노동자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위의 서울 지도는 파업을 한 곳을 표시한 지도인데요. 학교와 공장입니다. 5개월 동안 동맹 휴업 혹은 동맹 파업을 한 것입니다. 모두 이재유가 조직해서 진행한 것들입니다. 서울 전체적으로 세력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어린 여공은 처음 1~2년 동안 식사만 받을 뿐 무보수로 하루에 18~19시간 일을 해야 했습니다. 감옥과 같은 기숙사에서 한 달에 1번 외출할 수 있고, 그것도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고 합니다. 독립뿐만 아니라 이런 노동권 관련 주장도 했습니다.

 

이재유가 주장한 운동의 주요 내용은 아래입니다.

O 7~8시간 노동 보장

O 퇴직금 보장

O 가족 수당 지급

 

현재도 싸움 중인 노동권 관련 사항들을 1930년대에 운동을 하셨습니다.

 

 

위의 그림은 경성 트로이카라고 해서 당시 경성에서 제일 우두머리급의 사회주의 운동가 3명을 그린 것입니다. 이재유, 이현상, 김상룡인데요. 이재유가 당시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최고 우두머리급이었습니다.

 

이재유의 특징이라면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나 중국에서 지령을 받아 움직였는데요. (코민테른: 국제연맹) 이재유는 그렇게 해외와의 교류 없이 단독으로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만다라로 유명한 김성동이란 소설가가 이재유에 대해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아래입니다. -현대 아리랑-

“이재유는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황토 속살처럼 부드럽고 결고운 시적 감수성이 있었고 앎과 함이 같이 가는 국센 실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사람의 얼굴을 한 주의자였다.”

 

 

위의 사진이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 얼굴입니다.

이재유는 감옥에서 탈출도 많이 했는데요. 한번은 감옥에서 탈출하고 경성제국대학교의 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에게 찾아가 숨겨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야케 교수가 숨겨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 교수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경찰에게서 숨겨주다니 참 보기 드문 일 같습니다. 우리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안 좋아할지언정 개인적으로 일본사람을 만나고 괜찮은 사람이라면 잘 지내는 융통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미야케 교수도 공산 운동에 투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본 경찰은 탈옥한 이재유를 잡기 위해 현상금 500원(현재 가치 약 6천만 원)을 겁니다. 탈옥 후 2년간 이재유 행방은 묘연한데요.

 

이재유는 서울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있었습니다. 오늘날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1만여 평의 농토를 사서 농사도 하고 가축도 키우며 숨어서 자기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당시 이재유의 사회운동은 아래입니다.

O 새로운 농사 기법 전수

O 야학강습소에서 한글 교육

O 적은 이자로 대출

 

이러면서 출판물 유통망으로 점조직을 운영했습니다. 적기라는 출판물을 발행했는데요. 1936년 10월~12월까지 3차례 발간했습니다.

 

아래는 검사와 이재유의 대화입니다. -1937년 5월 1일 이재유 피의자 신문조서 제4회-

검사: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데 무슨 까닭으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가.

이재유: 내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이유는 일본에서 독립하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나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가 될 수 없고, 또 설령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해도 일본적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36년 12월 25일 오전 11시 이재유가 기관지 적기를 동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점조직 대원과 만나러 약속장소에 갔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 경찰들에게 잡힙니다.

 

 

위의 사진이 사복을 입고 이재유를 잡기 위해 매복해 있던 일본 경찰들입니다. 일본 경찰은 중요 범인을 잡거나 하는 등의 주요 이벤트가 있으면 단체로 저렇게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이재유의 옥중 투쟁은 아래입니다.

O 조선어 사용 금지 반대

O 수감자 처우 개선

 

 

위의 사진은 감옥에서의 이재유 독립운동가 모습입니다.

이재유는 1941년 형기를 마쳤으나 끝까지 사상 전향을 거부해 풀려 낳지 않고 계속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다 해방을 약 10개월 앞둔 1944년 10월 옥사를 합니다.

 

2006년 대한민국에서 이재유 독립운동가는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를 받습니다.

 

아래는 이재유 독립운동가의 말씀입니다. -이재유에 대한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

“처음에는 단지 민족의식에서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을 받고 나온 뒤 조선의 독립과 공산제도의 실현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선 적화의 수단으로 조선 독립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우선 조선 독립이 근본문제라고 생각해 활동했다.”

 

이상 이재유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전 사회주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독재자를 만드는 구조 때문에 그런데요. 이재유 같은 분들은 그런 것까지는 당시 모르셨겠지요. 나라나 세상을 이루는 이론은 그 목적도 중요하지만, 현실성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에 현실성이 떨어져서 민중이 주인이 아니라 독재자가 주인인 세상으로 만든 것이니까요. 앞으로 민주주의도 이런 사실을 교훈 삼아 더 현실성 있게 잘 발전시키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이재유 독립운동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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