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다쓰지 생애에 대해 알아봅시다

후세 다쓰지 생애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 인권변호사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하셨는데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 전문적으로 변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는데요. 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인은 2명입니다. 한 분이 후세 다쓰지이고요. 다른 한 분은 박열의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입니다.

 

 

위의 사진은 후세 다쓰지인데 한국말로 후세 다츠지라고도 합니다.

후세 다쓰지는 1880년 11월 13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한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열심히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자백가 시절에 묵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묵자는 겸애설인데요. 단순히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을 넘어서서 침략받은 약소국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전투력으로 사랑을 한 것이라면 후세 다쓰지는 법률로써 약자를 도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동학농민혁명 때 일본이 농민군들을 몰살시키지요. 청일전쟁도 일어났고요. 이것을 전쟁에서 돌아온 일본 사람들이 나는 농민군 몇 명을 죽였다, 나는 청나라 군인 몇 명을 죽였다고 자랑하듯 얘기했는데요. 15살 된 후세 다쓰지가 왜 저럴까 하면서 아픔을 느끼고 연민을 느꼈다고 합니다.

 

후세 다쓰지는 톨스토이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요. 톨스토이는 러일전쟁 때도 전쟁을 반대했던 인물입니다. 그것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후세 다쓰지는) 톨스토이에 심취한 인도주의자로서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평등하듯이 국가 또한 평등하다고 생각한 사람

 

후세 다쓰지의 셋째 아들 이름이 모리오인데요. 이게 한문으로 톨스토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정도로 톨스토이에 심취하셨습니다.

 

1899년에 메이지 법률학교에 입학합니다. 1902년 졸업하는데요. 졸업과 동시에 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검사가 되십니다. 22살일 때입니다. 하지만 후세 다쓰지는 1년 반 만에 사표를 냅니다. 당시 남편과 첩의 학대에 자식 셋과 자살을 시도한 여성이 있었는데요. 검찰 상부는 이 여인을 살인미수로 기소하라고 합니다. 후세 다쓰지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검사를 그만둡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등에 채찍을 휘두르는 일은 잔인하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을 버릴 각오로써 단지 내가 확신하는 길을 걷기 위해 범과 이리의 업인 나의 직을 버린다.”

 

1905년에 도쿄에 법률사무소를 개업합니다. 10년 정도는 큰 성과가 없다가 그 이후에 1920년에는 1년에 250건 정도의 사건을 수임하고요. 법률사무소용 건물을 따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 도쿄에 몇 대밖에 없던 오토바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2.8 독립선언 기념사진입니다. 조선인 유학생들입니다.

그냥 돈만 버신 게 아니라 당시 인권 변호사로서 명성도 얻으셨는데요. 한국독립운동가들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2.8 독립선언식 이후부터입니다. 1919년 2월 8일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독립선언식을 하는데요. 3.1운동이 2.8 독립선언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2.8 독립 후 학생들은 재판을 받는데요. 2심에서부터 후세 다쓰지가 변호를 맡습니다. 이때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연결이 되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변호하십니다. 당시로써는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조선인들에게는 후세 다쓰지 굉장히 소중한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인 우유배달 부도 매일 무료로 우유 2개를 후세 다쓰지 집에 주기도 하고, 하숙집도 후세 다쓰지 아내가 운영했는데 조선인들이 많이 가서 살았다고 합니다. 조선에도 한 번 왔었는데 열열한 환영을 하였습니다.

 

박열을 변호한 사람도 후세 다쓰지이고요. 일왕을 암살하려고 한 의열단원 김지섭을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전문적으로 변호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후세 다쓰지가 조선인 독립운동가만 변호한 것은 아니고요.

인권유린, 사회 경제적 약자, 억압받는 언론 사건, 노동계급의 사회운동들 변호를 하셨습니다. 저런 형사사건의 변호는 대부분 무료로 하시고요. 그밖에 평범한 민사사건들은 유료로 하셨습니다. 그래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니까 위에서 말한 대로 부인이 하숙집도 운영하셨습니다.

 

 

위의 여성분이 후세 다쓰지 부인 모습입니다.

 

저렇게 약자를 위해 변호를 계속하시니까 일본 권력층에게 미움을 받아 1932년에는 변호사에서 제명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일본 패망 후 바로 변호사를 복귀하십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재일조선인 관련 모든 사건을 후세 다쓰지가 담당합니다. 1953년(72세)에 대장암으로 사망하십니다. 6·25전쟁을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위의 사진은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입니다.

 

이상 후세 다쓰지 생애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저도 저렇게 살고 싶습니다. 변호사는 못됐지만, 저도 행복하게 살면서 도와야 할 사람들은 도우면서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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