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요약 글을 알아봅시다

여순사건 요약 글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여순사건은 여순반란사건이라고도 하는데요.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운동 진압 작전을 명령받은 여수의 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한 사건입니다. 경찰과 우익인사를 살해하며 5시간 만에 여수를 장악한 군인들은 다음날 순천까지 장악합니다. 그래서 일단 4.3운동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여순사건으로 민간인들이 오른쪽에 빨갱이로 분류되면 죽거나 처벌받게 되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3.1절 기념행사를 하는데요. 30,000명가량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거기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차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은 그것을 모른 척 지나가는데요. 군중들은 분노합니다. 사과를 요구하며 주민들이 경찰서로 몰려가는데요.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생각한 경찰이 실탄 발포를 합니다.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제주도민들은 파업으로 항의했습니다. 미군정은 참여자를 체포하고 갈등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러고 1년 후. 문제의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제주 주민들이 미군 철수,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며 봉기합니다. 결국 5.10 총선거에서 제주 2개 선거구는 무효가 됩니다. 그래서 제주도는 좌익의 섬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소요는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승만 정부는 강력 진압을 요구합니다. 이에 여수 14연대에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데요. 여수 14연대가 이에 명령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바로 여순사건입니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14연대 소속 남로당원들은 3발의 예광탄(빛이 나는 총알)을 신호로 작전을 개시합니다. 반란 세력이 처음으로 간 곳은 병기고와 탄약고입니다. 병기고에는 소총이, 탄약고에는 실탄이 많았기 때문에 일단 병기고와 탄약고 먼저 털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 50분에 비상 나팔 소리가 납니다. 나팔 소리를 듣고 14 연대원들 2,700명 정도가 연병장에 집합합니다. 이들은 그날 오후 10시에 있던 제주도로의 출병이 조금 앞당겨졌는지 알았습니다.

 

이때 봉기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인 남로당원 지창수 상사가 다음과 같이 연설합니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그러고선 무기를 다 획득하고 다음 날 새벽 1시에 여수 경찰서를 습격합니다. 반란군과 경찰이 약 2시간 동안 교전합니다. 그렇게 반란군은 여수 경찰서를 점령합니다. 또 반란군은 여수 읍사무소 등 주요 시설들을 점령합니다. 그렇게 점령한 곳은 인공기를 내 겁니다.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순천에 갑니다. 이때 순천에 파견 나가 있던 홍순석 중위가 이끌던 14연대 2개 중대가 14연대에 합류하여 순천 경찰과 대치합니다. 순천 경찰은 추가 병력을 요구하는데요. 광주 4연대가 순천으로 와서는 반란군인 14연대와 합류합니다.

 

이렇게 반란군은 하루도 안 돼 여수와 순천을 점령합니다. 그렇게 반란군은 부대를 재편해 3개 부대로 나눕니다. 그래서 서쪽에 벌교로 1부대가 가고요. 북쪽에 학구로 1부대가 가고, 동쪽에 광양으로 1부대가 갑니다.

 

 

그래서 10월 22일 전남 동부 6개 군을 장악합니다.

 

정부는 수도권을 지키는 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를 전남 지역에 투입합니다. 그렇게 투입된 진압부대는 우여곡절 끝에 진압에 성공합니다.

 

당시 여수를 탈환하기 위해 해안가로 진입해야 했는데요. 이후에 창설된 게 해병대입니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를 창설하여 해안가 진입의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영화 태백산맥이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인데요. 영화처럼 주민들은 낮에는 빨갱이로 몰리는 사람이 죽고, 밤에는 우익인사로 몰리는 사람이 죽는 사건이 자주 발생합니다.

 

정부는 빨갱이를 색출한다고 하고선 누군가가 나오면 즉결처분하는 방식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오전에 재판받고 오후에 단체로 저렇게 총살했습니다.

여순사건 관련 민간인 사망자 중 반란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152명이고, 진압군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은 2,117명입니다.

 

이승만은 가뜩이나 반공 주장을 했는데 여순사건 때문에 더 반공정신에 몰입하고요. 그 피해로 많은 민간인이 즉결처분으로 죽었습니다.

 

이때 박정희는 소령으로서 군 내부 남로당 총책을 맡고 있었는데요. 발각되어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모두 제공하고, 엘리트 군인이라 쓸모가 있을 것이라며 말리는 사람이 많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상 여순사건 요약 글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인데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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