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봅시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의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양국이 공격당하면 상대방이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 조약은 한미동맹의 기반이 되는 조약으로서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동맹 강화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승만 전 대통령 모습입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6.25전쟁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엄청나게 땡깡을 부려서 체결한 것입니다.

 

 

원래 미국 계획은 북한이나 중국이 남침하면 유엔군 차원에서 군사나 경제적 제재를 침략국에 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서는 성에 안 차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구상은 유엔군같이 다른 사람들 들어오는 것 말고 미국과 1대1로 지원을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일본에 준하는 안보 동맹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자동 개입조항이란 것이 있는데요. 동맹국이 공격받으면 다른 파트너국은 자동으로 전쟁에 즉각 개입하는 조약을 원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였는데요. 그는 그것을 전혀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칼에 거절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거절당하자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27,389명을 탈출시킵니다. UN군에게 동의도 받지 않은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직권 명령으로 석방한 것입니다.

 

탈주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철조망 밑으로 굴처럼 구멍을 뚫어서 거기로 국군이 안내해 줬다고 합니다.

 

탈주자들은 재빨리 인근 도시로 사라졌습니다. 27,000여 명의 탈주자 중 재수감된 반공포로는 931명뿐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반에 유엔군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줬습니다. 이것은 작전지휘권 이양 협정을 위반한 행동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너무 화가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북한과 정전 협정 회의를 하던 중이었는데요. 북한이나 중국 측도 화나 했습니다. “니네 알고 있었지”, “짠 거지” 이런 말이 오갔습니다. 그러면서 휴전 협상이 중단됩니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19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합니다.

“국제관계로 인해 불공평하게 그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했다.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포로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미국의 작전지휘권을 환수해서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아래는 아이젠하워의 일기입니다. 1953.7.24.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비협조적이다. 반항적이고 그런 사례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그래서 미국이 이승만 제거 작전을 생각합니다. 작전명은 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라고 이승만 대통령을 견제 또는 제거하기 위해 미8군 사령관이 수립한 군사적 대응 방안입니다. 지도자를 구금하고 유엔 군정을 실행하겠다는 말입니다.

 

원래 1953년 6월 18일이 휴전협정을 체결하기로 되어있던 날인데요. 이승만이 포로들을 석방하는 바람에 휴전협정이 미궁에 빠졌습니다. 포로 교환 문제는 휴전협정에서 제일 중요한 항목이었습니다.

 

미국은 국무부차관보 러버트슨 특사를 한국에 파견하여 이승만과 보름간 회담합니다.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진하는 것을 막으려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통제하에 두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상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우리나라 상황에서 든든한 안보를 어느 정도는 챙겨줘서 도움 되는 조약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자기네가 지켜준 나라가 많이 발전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선전하는 사례로서 가치가 있고 중국을 견제하는데도 효과가 있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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