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배상금 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한일협정 배상금 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14년간의 길고 긴 회담 끝에 협정을 체결한 것입니다. 국민과의 합의 없이 졸속으로 처리한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은 굴욕외교라는 비판과 함께 많은 국민의 분노를 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하는 모습입니다. 4·19 혁명 이후 가장 큰 시위였습니다.

체결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과 일본 관계에서 걸림돌이 되는 한일협정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해방 이후 양국 간의 관계를 개선하여 서로 교류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식민지배 사과인데요. 한일협정에서는 이 부분이 없었습니다.

 

한일협정은 14년간 7번 회담이 있었고, 1, 4000번의 회의가 있고 난 뒤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본이 어느 정도로 사과할 생각이 없었냐면 해방 후 일본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이나 건축물, 도로 같은 것을 건설하고 못 가지고 왔으니까 그것에 대한 비용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지급하라고 할 정도로 초기부터 사과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박정희 소장이 5·16쿠데타 성공으로 지도자가 되자 일본에서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일본 이름)로 그를 알아보고 이번 군사정권 내에 한일협정을 꼭 체결하도록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박정희가 일본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요. 오른쪽이 박정희이고, 왼쪽이 나구모 신이치로라고 해서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할 때 거기 교장이었던 사람입니다. 박정희는 당시 나이가 많아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는데요. 입학해서 일본에 충성하고 싶다며 혈서를 쓰고 그것을 본 저 나구모 신이치로라는 사람이 받아줘서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당시 한국 대표로 한일협정 관련해서 얘기하려고 일본엘 갔는데요. 저렇게 옛 은사를 데려오면 박정희는 한국 대표인데 일본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저런 분위기로 한일협정 회의를 한 것입니다.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통해 한일협정을 추진합니다.

 

 

위의 사람이 기시 노부스케인데요. 조선인을 강제동원하고, 만주국의 실세였고, 일본의 총리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전쟁 후에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 후 불기소처분되어 사형 안 되고 석방됩니다. 일본의 헌법 9조는 전쟁에 패한 일본의 군사력을 억제하는 내용이 담긴 조항입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이 일본 헌법 9조를 개정하려고 추진한 사람입니다. 아베 신조의 외할하버지입니다.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선배님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아래는 한일기본조약 제 2조입니다.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민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조약은 영어로 적었는데요. 이미 무효라는 단어는 already null and void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한국 기준으로 해석하면 한일병합조약을 비롯한 모든 조약이 무효 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요. (식민지배 불법)

 

일본 기준으로 해석하면 모든 조약의 무효 시점은 일본 패전 이후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 합법)

 

일부러 양국 국민 입맛에 맞게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말을 저렇게 한 것입니다.

 

한일협정 배상금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입니다. 문제는 문서에 저렇게 적었는데요. 돈 액수만 적었고 저 돈의 내용인 배상, 보상, 청구권, 경제협력 같은 돈을 주는 이유는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 외교라인에서는 독립축하금이라고 했다 합니다. 식민지배는 합법이었기 때문에 배상, 보상, 청구권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청구권이라고 보도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배상금을 준 나라는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인데요. 미얀마는 3억4천 달러, 필리핀 5억 5천 달러, 인도네시아 2억 2천3백만 달러, 베트남 3천9백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저 나라들은 다 4년 미만으로 식민지배를 했고 우리는 35년간 식민지배를 하였는데요. 형평성에 맞지는 않습니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배상금으로 20억 달러를 주장했는데요. 박정희 정부가 3억 달러로 축소해서 받은 것입니다. 그마저도 현금으로 준 것이 아니라 일본 생산물이나 일본인 용역으로 주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을 서두른 이유는 아래입니다.

1. 정권 안정을 위한 돌파구

2. 줄어든 미국의 원조

3. 자금 동원에 실패한 경제개발

 

이렇게 돈이 부족해지자 박정희 정부는 작더라도 빨리 돈을 받기 위해 저렇게 한일협정 배상금 내용을 추진한 것입니다.

 

저 돈을 받아서 박정희 정권은 포항제철공장 건립, 경부고속도로 건설, 수력발전소, 소양댐 건설을 하였습니다.

 

한국인 강제 노동 피해자들에게도 1975~1977년까지 민간 보상을 했는데요. 한 사람당 30만 원 수준으로 보상을 했습니다.

 

한국은 저 때부터 일본으로부터 소재를 받아 만들어 수출하는 산업구조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일본에 종속적인 산업구조가 저 때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일협정 관련해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하는 현상도 나타났는데요. 박정희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합니다.

 

박정희 정부의 당인 민주공화당이 일본 기업들로부터 뒷돈을 받은 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상 한일협정 배상금 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지도자는 지능은 중상 정도만 되도 됩니다. 참모들을 잘 활용하면 머리 좋은 것은 커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지도자의 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정하고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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