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사건에 대해 알아봅시다

전태일 열사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부터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 최대의 업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전태일 열사 사건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욕심이 끝이 없어서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쉬워지길 원합니다. 이런 현실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뭉쳐서 힘으로 사업주와 겨뤄야 하는데요. 한국에서 그 시작을 하게 만든 것이 전태일 열사 사건입니다.

 

 

위의 사진이 가운데 전태일 열사와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입니다. 모두 앳된 아이들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주 활동 무대인 동대문 평화시장은 1962년 문을 열었습니다. 옷을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었는데요. 1층에서는 옷을 팔고 2, 3층은 옷을 만드는 공장들이 있었습니다. 평화시장의 옷은 전국에 공급하는 옷의 70%를 차지했습니다. 다락방 공장(높이가 150cm 정도의 공장, 여자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음)은 2만여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옷 만드는 공장이 문제였는데요. 8평 정도의 작업장에 30여 명의 노동자가 작업을 했습니다. 허리를 제대로 펴기 힘들 정도로 공간이 협소했습니다. 또 옷을 다루어서 먼지가 많이 나는데 창문이나 환풍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은 30분이었고요. 화장실 사용을 줄이기 위해 음료 섭취를 제한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 ~ 밤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의 노동을 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해 노동자들이 힘들어하니까 사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각성제 주사를 놓기도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1964년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할 때 받은 일당이 50원입니다. 당시 커피 한잔이 30원, 설렁탕 한 그릇 값은 60원, 하루 하숙비가 120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업으로 일하는 거 외에도 껌을 판다던가 구두를 닦는다든가 하는 부업도 해야 했습니다.

 

당시 평화시장은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도급제였습니다. 경영자들(사업주)은 당시 평화시장주식회사란 형태로 카르텔을 형성해 있었습니다.

 

견습공들이 하루 50원을 받을 때 사업주들은 점심값으로 200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 20,000여 명 중 절반이 12~17세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가 풀빵도 사주고, 점심도 사주고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자기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자기는 집까지 3시간 되는 거리를 걸어갔다고 합니다. 점심도 자기는 먹었다고 거짓말하고 소녀 공들 밥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전태일 열사 일기입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나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1964년 견습공에서 1966년 미싱사가 됩니다. 당시 재단사는 공장장의 역할도 하고 권력이 공장에서는 나름 있었는데요. 당시 미싱사 월급이 7,000원이었는데 재단사가 되기 위해 그 월급의 반만 받고 재단사 보조를 합니다. 재단사는 노동자들을 채용하고, 해고하는 것이 가능했고요. 재단사가 실력이 있으므로 공장 매출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공장주도 재단사를 함부로 못 했습니다.

 

그렇게 1967년에 전태일 열사는 한미사의 재단사가 됩니다.

 

어느 날 전태일 열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는데요. 어린 여공이 피를 토하는 것을 봤습니다. 피를 토하는데도 돈이 없어 병원은 갈 수 없었고 피가 묻은 손을 씻을 곳도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요. 사람들에게서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법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노동법은 선진국 노동법을 번역해서 그대로 제정하여서요. 선진국 기준의 노동법 수준이었습니다. 근데 위에서 말한 사업주들의 카르텔이 권력자들에게 돈을 뿌려 그런 것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1953년 8월 9일 시행한 근로기준법의 주요 내용은 아래입니다.

 

“제 42조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근로할 수 있다.

제 45조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휴일을 주어야 한다.

제 56조 여자와 18세 미만자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의 사이에 근로시키지 못하며 또 휴일근로에 종사시키지 못한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빚을 내어 그 책을 구입합니다. 근데 법전이라 한문이 많았는데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전태일 열사가 읽기에는 무리였습니다. 3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책과 씨름을 하여 그 내용을 모두 학습합니다.

 

1969년 전태일 열사는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결성합니다. 근로기준법이란 것을 여태 몰랐던 사람들이라 바보회라고 이름 지은 것입니다.

 

바보회의 첫 번째 사업은 설문 조사를 실시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 현황에 대해 파악을 합니다. 노동시간을 묻는 질문이나, 휴일이 어느 정도인지, 환풍시설은 있는지 등의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설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청의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하지만 근로감독관은 사업주 편이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에게 무관심해 전태일 열사는 좌절합니다.

 

전태일 열사는 사업주 카르텔이 근로감독관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큰 권력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전태일 열사는 회사에서 해고됩니다.

 

전태일 열사는 회사를 자기가 차려서 노동자들을 사람답게 부려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계획도 세밀하게 세웠는데요. 창업자금 3,000만 원이 없어서 실행은 못 합니다.

 

 

1970년 8월에 결단을 내리는 전태일 열사인데요. 아래는 전태일 열사의 일기입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들의 곁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위의 것이 분신 3개월 전에 전태일 열사 일기장에 남긴 글입니다.

 

이때 이 일을 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란 예감을 한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을 쓴 후부터 굉장히 적극적으로 일을 합니다. 평화시장의 실태를 알리는데요.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에 보도가 됩니다.

 

 

위의 모습이 언론에 보도된 모습인데요. 골방에서 하루에 16시간 노동을 한다는 내용의 신문기사입니다. 내용은 아래입니다.

“나이 어린 여공이 좁은 방에서 하루 16시간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것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앓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저 기사가 나왔을 때 가지고 있던 손목시계 등을 팔아 그 돈으로 신문을 구입해 노동자들에게 뿌립니다.

 

경향신문 보도 2주 뒤 노동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노동청은 근로환경 개선을 약속하는데요. 사업주들이 국정감사가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다 국정감사가 무사히 지난 후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는 아무것도 안 들어줍니다.

 

그 후 1970년 11월 13일 오후 11시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려고 하는데요. 절망적이어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울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수막도 준비하고 연단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려고 했습니다.

 

계획했던 그 시간에 동료들이 경비원에게 많이 잡혀가고, 모였던 소수의 사람을 경찰들이 두드려 패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오후 1시경에 플래카드를 들고 내려갔는데 형사들이 다 찢어버렸습니다. 10분쯤 뒤에 근로기준법을 가슴에 품고 전태일 열사가 자기 몸에 불을 붙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외치고 불에 타서 돌아가십니다.

 

 

위의 사진이 그때 상황을 재구현한 모습입니다.

 

전태일 열사 어머님이 병원에 가셨는데요. 가니까 피부가 다 타서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을 정도로 몸이 다 탔다고 합니다. 아래는 그때 전태일 열사가 어머니에게 한 말씀입니다.

“어머니 내가 5분 뒤에 죽을지 10분 뒤에 죽을지 모르니까 잘 들으세요. 노동자들은 암흑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서 그 깜깜한 하늘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은 거예요. 어머니가 남은 평생 동안 그 구멍 조금만 넓혀주세요. 어머니 빨리 약속해 주세요. 혼자 하지 마시고요. 노동자들, 대학생들과 같이 해주세요. 빨리 약속해 주세요.”

 

어머니는 꼭 그렇게 하리라 약속하셨답니다.

 

전태일 열사 어머니는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에 꼭 계셔서 경찰에서도 250번 넘게 잡혀가셨다고 합니다. 전태일 열사 어머니 말씀은 아래입니다.

 

“내가 죽어서 태일이를 만나면 그 약속을 얘기해야 하지 않겠소. 나 너 말대로 열심히 살았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당시 사회가 외면해온 노동 현실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주노총 건립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상 전태일 열사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올해 생일에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를 다시 봐야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봤는데 머리에 남은 게 없네요. 자기가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도 외면하지 않는 선한 마음씨를 꿋꿋이 지켜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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