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구현사제단 탄생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하는데 많은 공헌을 한 단체가 바로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박정희 시절에는 유신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주셨고요. 전두환 시절에는 6.10 민주항쟁의 시작을 바로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많이 입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간단히 살펴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김수환 추기경 모습입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는 현실 문제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천주교가 들어왔는데요. 천주교와 일본이 교섭해서 종교와 정치는 구분한다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대표자들로 이루어진 3.1운동 민족 33인에도 천주교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1962년~1965년 열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전 세계 가톨릭 교구 지도자와 신학자들이 모여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회의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한 결과물은 아래입니다.
O 교회는 사람과 공동체를 위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O 신앙의 목표는 사람을 구하고 사회를 쇄신해야 한다.
O 정치와 종교는 협력하여 사회 쇄신에 기여해야 한다.
진보적인 사회참여를 받아들이는 한국 젊은 사제들에게 영향을 미친 해방신학이라는 이론이 퍼진 상황이었습니다.
1971년 김수환 추기경이 정부 비판 강론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사람들이 성탄절 미사를 보는데요. 명동성당의 미사가 1시간 동안 생중계로 방송했는데요. 이때 김수환 추기경이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합니다.
“정부와 여당에게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방송 스태프들은 남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요. 교황청에 김수환 추기경을 어떻게 해달라고 많은 압박을 했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17년 동안 명동성당 성탄 미사 생중계는 중단했습니다.
위의 분이 지학순 주교입니다.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비밀리에 납치가 됩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에게 돈을 건넨 혐의입니다. 이후 석방된 지학순 주교는 명동성당에서 양심선언을 합니다. 내용은 아래입니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72년 10월 17일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내용은 아래 4가지입니다.
1) 부정부패가 많아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2) 민주국가는 삼권이 나뉘어야 함에도 1인의 손에 장악되어 반대한다.
3) 1인 장기집권을 반대한다.
4)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되니 반대한다.
양심선언으로 유신체제를 비판한 지학순 주교는 또다시 구속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주교가 구속되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니까 30대의 젊은 신부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각 교구 신부들이 모여서 지학순 주교뿐만 아니라 구속된 민주 인사, 대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을 합니다. 이분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가 바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1974년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전국 사제의 절반 가까이가(300명 정도) 참여했습니다.
이상 정의구현사제단 탄생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민주화가 됐을 리 있을까 할 정도로 우리나라 민주화에 많은 공헌을 한 단체입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다 우리 아버님이나 조상님들이 피땀 흘려 만드신 것입니다. 나도 그 은혜를 받아 더 좋은 세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