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 요약 해드리는 내용의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2번 있었습니다. 1964년에 1차 인혁당 사건, 1974년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렇게 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여 많은 사람이 독재 반대 운동을 했는데요.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박정희 정부가 만만한 사람들을 사형시킨 것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입니다.
위의 사진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하신 분들 사진입니다.
정부의 주장은 위의 8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그 지령으로 민청학련 소속의 대학생들을 조종해서 대학생들이 폭력 시위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계열의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 일을 하는 단체 이름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로 줄여서 인혁당 사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1차 인혁당 사건 요약입니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항쟁 대규모 학생운동이 벌어집니다. 시위가 격화되자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시위 뒤에 배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래는 1964년 8월 20일 대한 뉴스입니다.
“북한 괴뢰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의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 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습니다.”
검거된 인민혁명당은 북한 노동당의 당의 명령을 토대로 혁신계 일부 인사와 학생 등 57명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건은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18일간의 철야 수사에도 혐의를 찾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인민혁명당이란 단어조차 조작된 것이란 결론에 이릅니다.
당시 담당 검사였던 장원찬 변호사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단 한 사람도 자백하는 사람이 없고 물증은 물론 없고, 물증은 애당초부터 없었던 사건. 인민혁명당이란 구호로 무슨 당을 만들어요? 첫째로 (내가 내린) 결론은 대단히 머리 나쁜 (중앙) 정보부 담당자들이 (인민혁명)당 명칭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위의 변호사님은 검사 때 저 사건 맡은 후 정부 말 안 들어서 검사직에 사표를 내셨다고 합니다.
이래서 중앙정보부는 궁지에 몰리게 되고 당시 검찰총장의 지시를 받은 수사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당직 검사가 기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언론에 의해 당시 고문과 폭력이 폭로되었습니다. 검찰의 재조사를 거쳐 기소되었던 27명 중 14명은 공소 취하, 최종적으로 피고인 13명에 대해 징역 최고 3년에서 1년 선고를 하였고 그 중 상당수는 집행유예를 풀려났습니다.
10년 뒤 2차 인혁당 사건 즉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1974년에 일어납니다.
위의 그림은 1차 인혁당 사건 때 주요인물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는 어떻게 직위가 달라졌는지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배경은 1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한일 협정 반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일으킨 것이고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유신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일으킨 것입니다.
저 때는 재판도 군사재판을 했고요. 재판장에서 혐의를 피의자에게 인정하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해도 맞는다고 대답했다 문서에 적었답니다. 그리고 재판에서 고문했다고 피의자가 말해도 검사가 넌 더 고문당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피의자들은 재판 전에 변호사를 1번만 만날 수 있었고요. 사형 판결을 받고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또 사형당한 후 고문당한 흔적을 가리기 위해 가족들이 보지도 못하고 바로 화장했다고 합니다.
피의자 가족들은 평생을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살았습니다. 너무 괴롭힘을 당해 자살하는 피의자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위의 문서는 사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의 문서인데요. 사형 확정 전에 이미 사형집행 하라는 내용의 명령 문서가 도착했던 것입니다. 날짜를 수정한 게 보이실 것입니다.
2007년 1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이 있었는데요. 여기서 모두 무죄로 선고 받았습니다. 32년 만에 명예회복을 하신 것입니다.
이상 인혁당 사건 요약해드리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켜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안 일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