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중앙정보부 장 사망 사건에 대해 알아봅시다

김형욱 중앙정보부 장 사망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형욱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같이 등장한 인물입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이건 아니다 싶은데 차마 밑에 사람들한테 명령 못 내리는 것도 척척 마음을 알아서 일을 진행하는 행동으로 신임을 샀습니다.

 

 

위의 빨간색 원이 김형욱 중앙정보부 장 모습입니다.

김형욱은 초반에 김종필 같은 엘리트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심중을 미리 알아차리고 일을 진행하는 눈치와, 타킷이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조져버리는 단순 무식함으로 2인자 노릇을 합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 장은 박정희 정권 18년 중 6년 3개월 정도를 2인자 노릇을 하는데요. 타킷이 되면 뭐든지 다 부수어놓습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을 2번하고 더 대통령을 하려고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같은 편 세력인 김종필이 반대했는데요. 이때 김형욱이 김종필 세력의 주축인 한국 국민복지연구회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고 부수는 역할을 합니다. 또 1969년 6월 20일에는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을 일으키고요. 의문의 교통사고, 불륜 금전 관계를 이용한 협박은 비일비재하고요. 국회에도 다 도청기를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분들은 김형욱 하면 치를 떤다고 합니다. 남산에 끌려가 고문도 많이 당하셨거든요. 남산 소릿길 터널이란 것이 있는데요. 중앙정보부 취조실로 통한 84m 길이의 터널인데요. 그곳에 가면 철문, 타자기, 물방울 등 소리로 고문실 분위기를 재현한 곳도 있습니다.

 

이런 김형욱 중앙정보부 장인데요. 박정희가 대통령 3선에 되자마자 며칠 만에 김형욱을 해고합니다.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하는 것과 여당의 김종필 세력과 협상을 한 게 박정희가 계속 대통령 하는 대신 김형욱 중앙정보부 장의 퇴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가 대통령 3선에 성공하자마자 김형욱을 내친 것입니다.

 

김형욱은 그 후 1971년 공화당 의원이 되기도 하는데요.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국회가 해산합니다. 그래서 김형욱도 국회의원에서 내려왔습니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장으로 있으면서 사람들한테 원한 살 만한 일을 많이 해서 그냥 권력 없이 한국에서 사는 게 불안해했습니다. 박정희도 자기를 내친 상태고, 권력은 없고, 자기에게 치를 떠는 사람은 굉장히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의 감시망을 피해 온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먼저 뿌려둔 사채를 회수하고요. 부동산도 처분합니다. 그래서 일단 돈 먼저 미국으로 보내고요. 이때 전 재산을 보내지는 못합니다. 그냥 보낼 수 있는 것만 보냈습니다. 당시 자기 자식들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고요. 아내 먼저 1973년 1월 5일 그냥 미국으로 가게 합니다. 그 후 자기는 대만의 중화학술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는데요. 대만에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합니다.

 

 

위의 저택이 김형욱이 구입한 저택입니다.

김형욱은 미국 동부 부촌 뉴저지 알파인에 27만 불 대저택을 구입합니다. 초반엔 도박이나 하면서 조용히 지냅니다. 카지노에서 한 번에 수만 불 이상을 날려가며 도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용히 살다 김형욱은 1977년 6월 5일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하는데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운 남한 정부가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사임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후 미국에서 코리아게이트가 열리는데요.

 

 

코리아 게이트는 한국에서 미국에 로비한 사건인데요. 주한미군 감축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의 독재와 인권탄압 관련 미국 내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미국에 로비했습니다. 이것 관련해서 이슈가 되어 코리아 게이트로 미국 국회에서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때 김형욱이 증인으로 미국 국회에 섭니다.

 

1977년 6월 22일 청문회에 서는데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리한 증언들을 쏟아냅니다. 박동선(로비스트)은 자신이 조종했던 공작원이었고, 김대중 납치사건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지시했다는 내용 등입니다. 박정희의 치부를 이야기하긴 했는데 속 시원히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패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3차례나 김형욱 관련 회의를 합니다.

 

김형욱은 1977년부터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2년 3개월 동안 집필을 하는데요. 200자 원고지로 5천 매 분량입니다. 두꺼운 책 3권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위와 같은 책 3권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글씨도 작습니다.

 

회고록이 곧 출간되는 소식이 박정희 정권에도 들립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인 윤일균이 김형욱을 만납니다. 그래서 설득하고 설득하고 설득해서 회고록의 원본을 받아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김형욱에게 50만 달러를 줬다고 합니다. 추후에도 순차적으로 돈을 계속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근데 1979년 4월 일본 군소 출판사를 통해 회고록의 요약본이 출간됩니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이 김형욱을 죽이려고 합니다.

 

김형욱이 미국에 있을 때는 경호원도 두고 조심히 살았는데요. 가끔가다 혼자서 프랑스에 갔다고 합니다.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이 파리에 입국합니다. 입국 6일 뒤인 10월 7일 김형욱은 평소 친분이 있던 이상열 프랑스 공사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전화를 겁니다. 두 시간 뒤 이들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데요. 이상열 공사는 이전부터 김형욱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형욱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보부 연수생 한 명을 사전에 포섭해 놨습니다. 중정 연수생은 자신을 도와줄 외국인 친구 2명을 데리고 이상열 공사와 합류합니다. 이들은 관용차를 타고 김형욱과 만납니다. 이상열 공사는 김형욱과 인사하고, 중정 연수생과 일행들을 소개하고 돈을 빌리려면 이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라 하고 자기는 먼저 떠납니다.

 

김형욱은 그들이 타고 온 관용차에 합승합니다. 출발한 관용차는 외곽순환도로를 타는데요. 이때 같이 탔던 외국인 친구 한 명이 김형욱 뒤통수를 가격해서 김형욱은 실신합니다.

 

관용차는 교외에 도착합니다. 외국인 2명이 김형욱을 끌어내어 숲속으로 데려가 권총으로 죽이고 두껍게 쌓인 낙엽에 묻었다고 합니다.

 

이게 현재 제일 타당한 썰인데요. 의문점은 아래입니다.

 

O 외국인 손에 김형욱이 마지막을?

O 살해 과정, 시신을 중앙정보부에서 확인을 못 함.

O 시신을 낙엽으로 덮고 마무리?

 

위의 3가지인데요. 증인의 말에서 숨기려고 하는 정황이 있어서 더는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상 김형욱 중앙정보부 장 사망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덕을 지키는 자는 한때 적막하지만, 권력에 아부하는 자는 만 고에 처량하다. 권력만 믿고 사람들을 막 다루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김형욱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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