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날짜 와 성공 요인에 대해 알아봅시다

인천상륙작전 날짜 와 성공 요인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날짜는 1950년 9월 15일 새벽 2시입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 물이 빠졌을 때 상륙작전을 하면 갯벌을 밟고 건너가야 해 기관총에 상륙군이 몰살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가능한 육지에 많이 몰려 있을 때(만조) 상륙작전을 해야 했습니다. 인천은 그런 날짜가 1950년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등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있었는데요. 그중 인천상륙작전 날짜 9월 15일을 고른 것입니다.

 

 

위의 빨간색 부분이 당시 북한 점령지역이고요. 한국군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남쪽 지역만 확보한 상황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확률이 5,000대 1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성공하기가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치밀한 사전 작업과 정보 수집능력으로 성공하게 맥아더 장군이 판을 깐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극비리에 진행한 작전은 아닙니다. 종군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공공연하게 이야기가 오고 가던 작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조언하기도 했는데요. 북한이 당시 부산을 8월 15일에 맞춰서 함락하는 것에 눈이 멀어서 얘기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도움이 되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인천상륙작전만 한 것은 아니고요. 수많은 기만전술을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해 장사리 상륙작전도 하고, 여러 가지 쓸데없는 공격과 삐라도 많이 뿌립니다. 당시 고등학생이면 엘리트였는데요. 고등학생들로 이루어진 학도의용군 772명이 장사리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사전에 해군첩보부대 17명을 인천에 침입시켜 정보를 수집하게 했습니다. 또 야간에 배가 인천으로 들어가야 했는데요. 그러려면 팔미도 등대가 반드시 운영이 돼야 했습니다. 이 팔미도 등대도 해군첩보부대와 켈로부대가 운영한 것입니다.

 

해군첩보부대는 사전에 침투하여 해로의 기뢰 설치 여부, 북한군 병력 규모 및 배치 현황, 보급선과 보급현황, 상륙지점의 지형 정보 수집 등 사전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해군첩보부대만 잘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고요. 지역주민들의 협조와 묵인 덕분에 첩보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날짜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해군첩보부대가 북한군에 발각되어 총격전을 하는데요. 이때 북한군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자살하기도 합니다.

 

 

위의 사진은 인천상륙작전의 설계자 맥아더 장군 모습입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성분들도 군에 지원하여 여러 가지 군 관련 활동도 하시고요.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라 빨갱이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젊은 남자들은 모두 해병대에 입대하기도 합니다. 일본 유학생들도 자원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되었습니다.

 

이상 인천상륙작전 날짜는 1950년 9월 15일이라는 것과 성공 요인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저 때 만약 져서 지금 김정은 밑에서 살았을 것 생각하면 아찔하네요. 북한은 우리나라 쳐들어올 수 있으면 쳐들어올 국가입니다. 전시 작전권을 빨리 회수하고 국방력을 항상 튼튼히 합시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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