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사건 에 대해 알아봅시다

아웅산 테러사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83년 10월 9일에 아웅산 테러사건이 일어납니다. 아웅산 테러사건은 북한이 당시 한국 대통령이던 전두환을 죽이기 위해 시행한 작전입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당시 원래 목적지에 예정보다 4분 늦게 오는 바람에 테러에 희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리 목적지에 와 있던 한국의 엘리트 각료 17명은 전두환 대신 이 폭발 사건으로 사망합니다.

 

 

위의 사진은 아웅산 테러 폭발이 일어난 직후의 사진인데요. 저렇게 건물의 모든 부분이 무너질 정도의 큰 폭발이 있었습니다.

 

 

아웅산은 미얀마의 독립 영웅입니다.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분인데요. 아웅산 묘소는 바로 이 아웅산도 묻혀있는 우리나라의 현충원 같은 곳입니다. 전두환은 외교를 위해 미얀마에 방문했는데요. 방문한 김에 미얀마 독립 영웅 묘소에 참배하러 갔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각료 17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보니까 한국에서는 데프콘 3가 발령되어 준전시 태세가 되었습니다. 데프콘 3는 한국 전쟁 이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아웅산 테러사건 이렇게 딱 2번만 발령되었습니다.

 

전두환은 저 날 미얀마 외상이 전두환한테 오면 같이 아웅산 묘소를 가려고 했습니다. 근데 미얀마 외상이 오다가 자동차가 고장 나 다른 차로 갈아타고 오느냐 4분이 늦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도 아웅산 묘소에 예상보다 4분 늦게 도착했는데요. 이 4분 전에 폭탄이 터져 전두환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북한 테러범들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웅산 테러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83년 9월 15일 미얀마 양곤 강에 북한의 화물선인 동건애국호가 도착합니다. 동건애국호에는 아웅산 테러사건을 일으킬 북한의 특수부대원 3명이 탔습니다.

 

테러범들은 동건애국호가 수리한다는 핑계로 정박한 틈을 타 미얀마 내륙에 침투합니다. 그리고 사전에 마련한 북한 공관원의 사옥에서 지내며 한동안 전두환의 순방 정보를 입수합니다.

 

아웅산 테러사건 3일 전인 1983년 10월 6일 테러범들은 공관원 사옥에서 나와 아웅산 묘소 인근에서 노숙합니다. 노숙하며 아웅산 묘소 주변 지형도 익히고 당시 상황을 관찰합니다.

 

아웅산 테러사건 이틀 전인 1983년 10월 7일 새벽 2시에 아웅산 묘소로 테러범들이 침투합니다. 당시 경비원이 자고 있어서 쉽게 침투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이 아웅산 묘소 건물 내부 폭파 전 모습입니다. 저렇게 건물도 있고, 정원도 있습니다.

 

 

위의 그림처럼 지붕에 폭탄을 설치합니다. 폭탄으로 죽이고, 소이탄으로 다 불태워 증거를 없앨 생각이었습니다. 지붕은 원래 쇠가 있는 위치라 경호원들이 금속 검사를 해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 대통령 경호실은 전두환이 방문하기 3일 전에 아웅산 묘소를 금속탐지기로 검사했는데요. 테러범들은 이틀 전에 폭탄을 설치하여 사전 검사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테러범들은 최대 2km 거리에서도 작동하는 원격 폭발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북한 테러범들은 오전 10시 25분경 전두환이 탄 차가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전두환 차가 지나가면 5분 뒤에 테러를 실행한 계획이었습니다.

 

근데 전두환은 예상 시간보다 4분 늦게 오고 딱 그 시간에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가 탄 차량이 태극기도 달고 호위를 받으면서 지나갑니다. 그래서 테러범들은 미얀마 대사인 이계철이 탄 차량을 전두환이 탄 차량으로 오인합니다. 이후 예정대로 폭파를 시킵니다.

 

 

위의 사진은 폭발 몇 초 전에 찍은 사진인데요. 저렇게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각료들이 대기를 하고 있던 상황에 폭탄이 터져 우리나라 각료 17명이 죽은 것입니다.

 

 

아웅산 폭탄테러 발생 시간은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8분 경입니다.

 

당시 미얀마 의료수준은 높은 수준이 아니라 소독약이 없어, 그냥 물로만 상처 부위를 씻고, 가위도 없어서 면도칼로 자르고 했다고 합니다.

 

당시 전두환은 미얀마뿐만 아니라 인도, 스리랑카, 브루나이, 호주, 뉴질랜드 등을 한꺼번에 들러서 외교를 하려고 했는데요. 이 모든 계획이 취소되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아웅산 테러사건을 일으킨 북한 테러범의 이름은 진모, 강민철, 신기철입니다. 이들은 모두 북한 특수부대원이었습니다. 범행 직후 테러범들은 2조로 나누어 도주를 시도했는데요. 수상하게 여긴 미얀마 주민의 신고로 체포됩니다.

 

신기철은 경찰과 대치 중 사살되고, 진모와 강민철은 생포됩니다. 여기서 강민철이 북한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아 사건 관련 다 진술을 하여 지금처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은 5·18 이후 처음으로 반미운동이 시작되었는데요. 그러면서 민주화에 대한 시위도 많이 했습니다. 이때 북한 입장에서 독재자인 전두환을 제거하면 남한은 혁명 일어날 테니까 이때 친북한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친북한 정권이 들어서지 않더라도 혼란을 틈타서 더 침투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 중이었는데요. 북한이 이렇게 큰 사건을 일으키면 민주화를 향하던 행동들이 죽어버리고, 반공 운동, 독재자 친정권 운동만 주구창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이 아웅산 테러사건 후 한국 사람들이 반공 운동을 하는 모습입니다.

 

1983년 10월 13일 여의도 광장에서 아웅산 테러사건 희생자 영결식을 했는데요. 약 100만 명이 참여합니다.

 

당시 12·12 사태에 적극 관여했던 육사 12기 출신들을 중심으로 김일성 암살 작전인 벌초 계획이 진행됩니다. 실미도 684부대 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실제 훈련을 받은 사람 말에 의하면 북한 말투나 김일성 찬양까지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전시 작전권은 미국에 있습니다. 한국과 북한이 또 전쟁하면 미국이 참여해야 하는데 미국이 그러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승인도 없어 전두환도 수긍하고 해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희한하게 남한과 북한 관계에 훈풍이 돌기 시작합니다. 1984년 중부지방에 대홍수가 있었는데요. 그때 북한에서 쌀, 시멘트, 옷감 등 구호물자를 지원합니다. 1985년에는 적십자 회담을 해서 남쪽과 북한이 방송국 카메라를 교환해 서로를 촬영하고 방송으로 내보냅니다. 또 1985년 9월에는 예술공연단과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 상호 방문합니다.

 

남한에서는 늑대사냥이라는 작전을 수행하는데요.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 작전입니다. 아웅산 테러사건을 본보기로 보여주며 다른 나라 대통령을 북한이 이렇게 죽이려고 했다고 많은 나라들에 얘기하는 것인데요. 많은 나라들이 북한과의 외교 단절과 경제적 제재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는데요. 서방국들을 중심으로 60개 국가가 북한과 교류를 중단하거나 축소합니다. 미얀마는 북한 대사관을 퇴출하고 외교 단절을 선언합니다.

 

1983년 말 수교국은 남한이 120개국, 북한이 102개국으로 남한이 숫자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아웅산 테러사건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한 명분으로 일해재단을 만드는데요. 이 일해재단이 미르재단처럼 나중에는 비자금이 모이는 부패의 온상이 됩니다.

 

이상 아웅산 테러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저 때 전두환이 잘못되었으면 전쟁도 날 수 있었습니다. 북한하고 지금 우리나라 하고 사이가 안 좋은데 대통령 외국 나갈 때 더 조심해야 할 듯합니다. 감옥에 보내도 우리나라가 보내야지 북한에 잘못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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