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님을 소개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님을 소개하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차미리사는 여성 독립운동가이고, 여성 교육운동가 십니다. 1900년대 초반 한국은 을사늑약 등으로 일본에 침탈을 겪는데요. 이때 한국 남자들은 민족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문제만 있었지만, 여자들은 그것과 함께 역사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던 여성들의 인권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까지 같이 안고 있었습니다. 이 민족의 재건과 함께 여성 인권까지 모든 사항을 여성 교육으로 극복하려고 하신 분이 바로 차미리사 입니다.

 

 

위의 사진이 차미리사입니다. 1879년~1955년입니다.

차미리사는 1879년 아현동 차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기대했다가 크게 실망한 아버지는 차미리사의 이름을 섭섭이로 지었습니다. 차미리사의 본명이 바로 섭섭이고요. 미리사는 세례명입니다.

 

 

차미리사는 17살에 김씨 집안으로 시집이 갔습니다. 그래서 초기 차미리사는 김미리사라고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미리사의 남편이 결혼 3년 만에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어 미리사는 과부가 됩니다. 슬하에 딸을 1명 두었습니다.

 

 

기댈 때 없던 섭섭이에게 안식처가 되어 준 곳이 바로 위의 모습이었던 상동교회입니다. 모든 이는 평등하고, 여성도 존귀한 존재라는 기독교에서 가르침은 섭섭이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섭섭이는 세계명 미리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상동교회가 새로 건물을 지을 때 건축 헌금을 한 목록에 미리사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상동교회는 1889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이 세운 민족운동의 뿌리가 깊은 곳입니다. 일제 강점기 수많은 애국지사가 상동교회에서 배출되었습니다. 헤이그 특사의 3인방 중 2명인 이상설과 이준도 상동교회 관련자고요. 신민회 창설도 상동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미리사는 상동교회에서 여성이라는 자각과 민족이라는 의식에 눈을 떴습니다. 여성이 항상 무시당하고 억압당하다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인 것을 깨닫습니다. 또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있는 식민 구조, 사회 정치적인 구조에 대해 저항이 나왔습니다.

 

상동교회 청년회가 운영하던 공옥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차미리사는 배우기를 계속 갈망했는데요. 주변에서는 유학을 많이 권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인 차미리사에게 유학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1900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다는 뉴스를 접합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에스더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학에 성공합니다.

 

1901년 미리사는 마침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어린 딸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중국 상하이로 떠납니다. 당시 나이 23살입니다.

 

1901년 상하이는 서구 문명이 들어오는 아시아의 창이었습니다. 선교사 주선으로 중국 쑤저우의 버지니아 여학교에 입학합니다. 유학 생활은 가난하고 고달팠습니다. 언어를 따라가는 것은 특히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건강이 점점 나빠졌습니다. 당시 몇 달을 고열에 시달리던 미리사는 청력을 크게 다치고 맙니다. 뇌막염으로 청각장애가 찾아왔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4년간의 중국 유학 생활을 끝낸 미리사는 더 큰 세상을 찾아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합니다. 미리사가 정착한 곳은 캘리포니아 휴양도시 패서디나입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가 본격화하던 시기 미리사는 페서디나 한 호텔에서 근무하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1907년 설립한 대동보국회란 단체가 있는데요. 재미 한인 독립운동단체입니다. 장경, 방사겸, 차미리사등이 주도한 곳입니다.

 

 

위의 사진이 대동보국회에서 활동할시 차미리사이 모습입니다.

당시 미리사는 공부 자체, 유학 목적 자체는 미뤄놓고 조국을 구하기 위한 애국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미리사는 대동보국회의 기관지 대동공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사설 등의 글을 올렸습니다.

 

미리사는 30살 나이 재미 한인사회의 유명 인사이자 여성 리더로써 당당히 자리매김했습니다.

 

5년간의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후 1910년 미리사는 미국 미주리주 스캐리트 성경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0년 ~ 1912년 동안 학교에 다니는데요. 당시 학교에서 3명뿐인 외국인 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졸업하면서 자기가 배운 교육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가서 그대로 교육하겠다는 희망을 굳게 품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때 처음에 서울에서 학생들 중심으로 3.1운동이 일어나니까 일본은 학교들에 휴교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지방의 자기 고향으로 가서 3.1운동을 이끕니다. 그래서 전국이 3.1운동을 한 것입니다. 이때 여학생들이 그런 3.1운동의 씨앗이 되는 행동들을 많이 합니다.

 

3.1운동 당시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가 일본의 억압된 구조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민족주의적 관념이고요. 두 번째는 여성도 정치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전까지는 역사적인 일은 대부분 남자가 했습니다. 하지만 3.1운동 당시 여학생들이 맹활약하면서 여성도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특히 배화학당 여성들이 3.1운동에 주동자들이 많았는데요. 차미리사가 당시 배화학당 기숙사 사감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이 배화학당 기숙사 사감이던 차미리사의 당시 사진입니다.

미리사는 감리사 선교사 자격으로 배화학당에 부임한 것입니다.

 

 

3.1운동 1주년이 되던 날 배화학당 기숙사 학생들 전체가 학교 뒷산에 올라 만세 시위를 합니다. 이 일로 학생 24명이 체포되는데요. 일제는 그 배후로 차미리사를 지목합니다.

 

요주의 인물이 된 미리사는 결국 학교를 떠납니다. 감리교 선교사라는 안정적인 지위도 내려놨습니다.

 

미리사는 모든 여자를 위한 교육 일에 몰두합니다. 그 일환으로 조선여자교육회를 창설합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한 여성 계몽운동 조직입니다.

 

미리사는 여성 교육이야 말고 국권 회복의 동력이라 믿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무언가에 앞장서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남성들이 하면 뒤따라가는 정도였는데요. 조선여자교육회는 남성들의 단체인 조선교육회보다 4개월이나 앞섭니다. 여성들이 주체적, 자발적으로 했다는 의미가 상당히 큰 것입니다.

 

미리사는 1921년 7월 9일 조선 여자 강연 단을 조직하여, 서울을 벗어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료 강연회를 합니다. 여성들을 위한 강연회인데요. 유료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이 참여했습니다. 3개월간 전국 67개 고을에서 순회 강연회를 하는데 노래도 부르고, 연설도 하고, 토론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국의 여성들과 소통도 하고, 여성 교육, 여성해방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위의 사진이 미리사를 중심으로 전국 순회 강연단을 한 여성들 모습 여섯 분입니다.

 

아래는 신문 기사입니다.

-조선일보 1921년 7월 25일-

“전등 아래 나타난 여사가 독특한 웅변을 토해내자, 회당을 가득 메운 청중은 깊은 감동을 받아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무려 이천 명의 청중은 신경 자극을 받았는지 박수갈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성황 중에 당일 연조금이 50원에 달하였다더라”

 

 

위의 지도에서 점 부분이 강연회를 한 장소입니다. 선은 강연 단이 이동한 경로입니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덕성여고가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님이 만든 조선여자교육회가 뿌리입니다.

 

여성들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많이 알아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하는데요. 그런 것을 기르고자 여자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노력하신 것입니다.

 

1921년 10월 10일 순회강연 성공 이후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청진동 회관에서 개관합니다. 그 후 1924년 12월 21일 안국동 낙천사로 이전합니다. 이름은 근화로 합니다. 당시 여자학교가 이화, 배화 같이 꽃 화자가 들어가니까 자기네도 꽃 화자를 붙여 근화로 한 것입니다. 근데 근화의 뜻이 무궁화꽃입니다. 한국 국화가 무궁화라 일제로부터 견제를 받았습니다.

 

근화여학교는 학령기 여성뿐만 아니라 기혼여성들에게도 문을 열었습니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연극회, 음악회, 바자회 등을 하며 모았습니다. 일제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1도 없었고, 스스로 자금도 모으며 자립적으로 운영한 것입니다.

 

 

위의 사진이 작고 1년 전 근화여학교 졸업식 때의 백발이 된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입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는데요. 근화여학교 전교생 300여 명도 참여합니다.

 

당시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사립학교들은 일제의 탄압 대상이었습니다. 근화여학교 같은 곳인 것입니다. 급기야 일제는 근화라는 이름이 불온하다며 변경할 것을 요구하고, 미리사에게 교장에서 물러날 것도 주문했습니다. 더 나아가 1937년 38년이 되면 황국신민 교육을 하라고 합니다.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는 커다란 분노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는 향년 77세 1955년에 돌아가십니다. 2002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 되십니다.

 

이상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님을 소개하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당시 남자들은 독립운동만 하면 됐는데요. 여성분들은 독립운동과 함께 여성 인권 운동도 같이 해야 해서 더 힘들었을 듯합니다. 여성이 잘돼야 남성도 더 좋은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사이좋게 서로 하모니를 이루며 잘 살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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