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 어머니 로써의 처세술에 대해 알아봅시다

혜경궁 홍씨 어머니 로써의 처세술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 영조의 며느리, 정조 대왕의 어머니입니다. 책 한중록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세자에서 폐위되고 자신과 아들이 궁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상황에서 어떻게 정조 같은 성군을 만들어 냈는지 그녀의 활약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영조의 가계도인데요. 영조에게는 원래 첫째로 효장세자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10살에 죽습니다. 그래서 영조 나이 42세에 사도세자란 아들을 보게 되고, 돌 지난 후 파격적으로 세자가 된 것입니다.

한중록은 순조 임금 때 혜경궁 홍씨가 집필한 책입니다. 저 ‘한’자가 한스러울 한자가 아니라 한가할 ‘한’(閑)자입니다. 혜경궁 홍씨가 회갑 때(60세) 모든 고난과 역경이 다 지나가고 한가할 때 집필한다고 해서 한가할 ‘한’자를 쓴 것입니다. 저 한중록을 통해서 사도세자의 여러 사건이 기록된 것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10살 때 사도세자와 결혼합니다. 한중록에 묘사된 사도세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글 읽는 소리도 크고 맑으시며...” “(왕과) 감히 마주 앉지 못하고 신하들처럼 몸을 굽히고 엎드려 뵈었으니(...)”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를 볼 때는 괜찮게 보였으나 이상하게 영조 앞에서만 있으면 벌벌 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영조와 세도세자의 갈등은 엄청나게 깊었습니다. 일단 둘이 기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영조는 학문을 추구하는 편이었고요. 사도세자는 예체능 쪽 인재였는데 조선에서 사용하는 무예 표준을 집대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책보기를 별로 안 좋아했고요. 이런 점 때문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맞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영조는 정식 정비가 아니라 후궁의 아들 출신입니다. 그래서 정당성 등 여러 방면에서 공격받을 이유가 많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요. 아들 교육에도 그렇게 꼼꼼하게 했습니다.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일단 기질적으로도 왕인 아버지와 많이 달랐고요. 아버지가 너무 꼼꼼하게 자기를 대하는 것입니다. 숨이 막히지요. 대리청정할 때도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하면 영조는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하냐 그러고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으면 그런 것까지 나에게 묻느냐 하면서 핀잔을 주고요. 이런 식으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대리청정하는 13년 내내 무척 괴로웠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있어 사도세자는 정신병까지 걸립니다.

 

한중록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증상은 아래 3가지입니다.

O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패중

O 벼락을 두려워하는 뇌벽증

O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의대증

 

당시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영조는 다 사도세자 탓이라며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을 제대로 입는 것은 영조를 만난다는 의미이기에 옷 입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는데요. 사도세자가 이렇게 정신이 안좋으면서 자기 마음에 안들면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합니다. 그 숫자가 100이 넘었는데요. 그런 것은 신하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이를 낳은 궁녀까지 때려죽였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알려져 결국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혜경궁 홍씨의 처세술이 빛을 발합니다.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혜경궁 홍씨가 영조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다면 혜경궁 홍씨 뿐만 아니라 정조도 무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현세자빈도 옛날에 인조에게 그렇게 따지다가 눈 밖으로 나서 결국 독약을 먹고 사형을 당했는데요. 혜경궁 홍씨는 그 후 영조를 만났을 때 사도세자 얘기를 안 하면서 영조에게 잘 대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자가 안전하게 보호됨이 모두 왕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대하니까 영조가 오히려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또 사도세자가 살아 있을 때 영조가 사도세자는 싫어해도, 어린 정조는 이뻐했습니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영조 기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도 영조가 정조를 칭찬하면 그 소리가 사도세자한테 들어가지 않게 했습니다. 사도세자가 안 좋은 마음을 품을 수 있으므로 중간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영조와 혜경궁 홍씨가 기거하던 궁은 달랐는데요. 혜경궁 홍씨는 창경궁에서 지냈고, 영조는 경희궁에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세자 교육을 위해(사도세자 죽은 후) 정조를 나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때도 혜경궁 홍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떠나보내어 섭섭함은 작은 일이요. 윗분을 모시고 배우게 하는 것은 큰일입니다.”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이런 것을 저렇게 말하며 영조에 대했던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안위도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혜경궁 홍씨의 최대 목적은 정조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조에게 잘 대했는데 그게 효과를 많이 발휘했습니다.

 

정조가 왕이 되고 왕권이 어느 정도 강화되면 복수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세력들을 제거하고 싶었을 텐데요. 실제로 정조는 자기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던 극소수의 세력만 제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혜경궁 홍씨의 영향력도 있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러울수록 지극히 보배로운 몸을 보호하여(...) 스스로 착하게 행하여 아버님의 한을 갚아야 합니다.”

 

칼로써 복수하지 말고, 성군이 되는 것으로 복수하라고 한 것인데요. 실제로 정조는 복수는 거의 안 하고 성군이 되었습니다.

 

한 예로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 죽게 한 세력 몰살 시켰다가 결국 나중에 자기도 왕에 쫓기는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상 혜경궁 홍씨 어머니로서의 처세술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혜경궁 홍씨가 저럴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원리를 아는 것이 큰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니까 거기에 맞춰서 처세를 한듯합니다. 자식을 명문대로 보내는 3가지 조건이 할아버지의 재력,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이라고 하는데요. 아버님들 자식 교육에 너무 관여 안 하시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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