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제동맹 결혼동맹 에 대해 알아봅시다

나제동맹 결혼동맹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강 유역은 백제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고부터 백제의 고토였습니다. 한강 유역은 백제의 수도 같은 곳이었고요. 역대 백제왕들의 무덤들도 모여있던 곳입니다.

 

 

위의 세력도는 475년 정도의 세력도 인데요. 보시는 것처럼 북쪽에는 북위라는 나라가 세력을 떨치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당시 고구려 왕인 장수왕은 북쪽으로 정복하기에는 무리라 자연스럽게 남쪽을 봤고요. 그러다 보니 한강 유역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한강 유역은 물이 많다 보니 토지는 기름지고요. 또 한강이 있다. 보니까 수로를 통한 교통의 요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시 한강을 통해 서해로 나갈 수 있어 중국과 교류하기도 좋았습니다. 이런 천혜의 요지인 한강 유역을 백제가 가지고 있었는데요. 장수왕 때 한강 유역의 좋음을 알고 고구려가 뺏었습니다.

 

475년에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군사가 한강을 건너 백제 아차성을 공격하여 성을 정복하고 당시 백제왕이던 개로왕을 참수합니다. 이 부분이 시험에 자주 나온다고 하는데요.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죽인 백제왕이 개로왕이라는 것입니다. 외울 때는 “개로왕이 괴로워”라고 외우시면 쉽게 외워지실 것입니다.

 

아차성은 현재의 아차산이 있는 곳에 있던 백제성입니다.

 

삼국시대에 전쟁하면서 죽은 왕은 고구려에 고국원왕이 있고요. 백제에는 책계왕, 개로왕, 성왕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당시에는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이 함께 어려움을 오랫동안 같이 이겨내면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삼국시대에는 그런 거 없이 그냥 말이 통하는 다른 나라였습니다.

 

백제는 이렇게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500년간 지켜온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뺏깁니다.

 

그래서 백제는 475년 웅진(공주)로 천도합니다. 한강과 공주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체급이 달라지는 정도의 효과가 백제에 있었습니다.

 

백제는 자신들의 고토인 한강 유역 땅을 회복하는 것이 지상과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힘으론 부족했는데요. 그래서 신라와 손을 잡습니다. 이래서 생긴 것이 나제동맹 결혼동맹입니다.

 

아래는 삼국사기 내용입니다.

“493년 봄 3월에 백제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다. 왕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551년 나제동맹의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한강 유역의 고구려 땅을 공격합니다. 나제동맹의 목표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땅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북방으로부터 돌궐의 압박이 있었고,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내분이 있던 상황입니다. 이런 고구려에 나제동맹의 공격은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뺏기는 선에서 마무리 하고 싶었습니다. 북쪽의 돌궐로부터 위협이 크고 내분도 있었기에 남쪽에서만이라도 분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백제는 한강 하류 6군을 차지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을 차지합니다.

 

백제는 한성함락 이후 76년 만에 겨우 되찾은 고토였습니다.

 

 

위의 지도 같은데요. 파란색이 백제가 차지한 땅이고, 빨간색이 신라가 차지한 땅입니다. 언뜻 보면 신라가 더 많은 땅을 가져서 더 이득이지 않나 생각하겠지만, 중국과 교류를 하고, 수로를 제대로 이용하려면 한강 하류 지역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실속 면에서는 백제가 더 큰 이득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신라가 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중 가장 뒤처진 국가였는데요. 그 이유가 중국과 직접 교류를 할 수 없어 선진문물을 빨리 받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신라로서는 중국과 직접 교류를 할 수 있는 창구가 절실했습니다. 이전에는 고구려의 허락을 받고, 고구려의 감시하에 육로로 중국과 교류를 했는데요. 한강 하류를 장악하면 그런 눈치 안 보고 직접 중국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눈독 들였습니다.

 

 

이걸 모르는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에서 우리가 이겼으니까, 나제동맹이 더 고구려 땅으로 치고 들어가자고 진흥왕에게 제안했는데요. 진흥왕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삼국유사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 하였습니다.

 

당시 진흥왕 나이가 20대 초반 정도였는데요. 백제와의 120년 나제동맹을 끝마치려고 준비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만큼 한강 하류를 통한 중국과의 직접 교류는 신라에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그리고선 신라가 551년 고구려와 밀약을 합니다. 고구려는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한강 유역은 뺏기더라도 남쪽에서 더 이상 분쟁이 없기를 바랐고요.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 차지한다는 것을 고구려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이 둘의 생각이 맞아떨어져 밀약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 후론 당연히 신라 진흥왕이 백제 뒤통수를 쳐 한강 하류 지역을 모두 빼앗습니다.

 

삼국사기

“553년 7월에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

 

어쨌든 간에 신라는 무력으로 한강 하류를 백제로부터 빼앗고요.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을 총책임자로 임명하여 최선을 다해 지킵니다.

 

이 시점에서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싸웠는지 아니면 백제 성왕이 작전상 철수했는지는 기록이 달라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553년에는 신라가 한강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백제 성왕은 신라에 이를 갈았습니다. 자기 뒤통수를 쳐 백제의 고토를 다 빼앗겼으니 이를 안 가는 게 이상할 정도인데요. 성왕은 이 상황에서 일단 자기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냅니다.

 

진흥왕은 의심은 됐으나 일단 한강 유역을 다 차지한 후 백제가 사돈 맺자고 하니까 일단 OK를 한 것입니다. 성왕 입장에서는 이러면서 일단 시간을 번 것입니다. 자기 딸을 진흥왕에게 보내고 일본과 가야에 연락해 지원군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으로 자기 무력을 크게 만들고 신라를 공격하려 한 것입니다.

 

진흥왕도 백제 성왕의 딸과 결혼했지만 안심하지 않고, 성을 보수하는 등 준비를 했습니다.

 

554년 충북 옥천에 있는 신라 영토인 관산성에 백제, 왜, 대가야 연합군이 공격합니다. 백제 태자 부여창이 이끄는 백제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몰아치어 전투 초반은 백제군이 승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관산성이 함락될 때쯤 백제 성왕이 호위 병사 50여 명만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했는데요. 응원차 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신라에 노출되어 길목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백제 성왕이 붙잡힙니다. 그리고선 참수를 당합니다.

 

당시에는 스파이가 굉장히 많았는데요. 이런 스파이에 의해 백제 성왕이 관산성으로 향한다는 것을 신라가 알고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이후 백제 연합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3만여 명의 군사가 모두 전투에서 패해 죽습니다.

 

당시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군사를 모아서 간 것인데요. 모두 죽은 것입니다.

 

이후 신라 진흥왕은 562년 대가야 마저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위의 지도가 6세기 진흥왕 때 신라 영토입니다. 저렇게 신라 최전성기를 맞이하며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상 나제동맹 결혼동맹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백제 성왕 아쉽네요. 그냥 전투 끝날 때까지 성안에 있지 왜 전쟁터에 가서 다 죽게 했는지 아쉽습니다. 전투할 땐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맙시다. 파이팅!!

반응형
그리드형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