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시대 당나라 유학파로 최고의
학자십니다.
최치원의 자는 해운, 고운 등이 있는데 부산 해운대의
해운이 최치원의 자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위의 사진은 최치원님 초상화와 최치원에 대해 있는
유적지 들입니다.
최치원의 시는 중국에서도 유명하여 시진 핑 주석이 2013년
한중 정상회담때 최치원 시를 직접 읇으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치원에 대해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최치원은 12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갔는데요.
그 이유는 6두품인 최치원은 신분적 한계가 있어서 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최치원 아버지께서 당나라에서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빈공진사시라는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이 있었는데요.
오늘날로 보면 9급 공무원 시험정도 된다고 합니다.
872년에 발해 유학생 오서도가 빈공진사시 수석합격을
하는데 충격을 먹은 신라유학생들과 최치원은
더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최치원에 대해 말한다면 인백기천이라는 말을 빼트릴 수
없는데요.
인백기천(人白己千)은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정신으로 최치원은 공부를 합니다.
그 2년 후 유학생활 6년 만에 18세(874년) 최치원은 빈공진사시에서
수석으로 합격을 합니다.
위의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당시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하는 남북극시대 이었습니다.
고운집 제1권 예부 배상서 에게 보내는 장문 내용은 아래입니다.
“덕분에 이전의 치욕을 씩을 수 있게 되었으니...(발해 수석
합격을 말하는 것임)
앞으로 신라와 발해의 위상이 혹시라도 바뀌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계원필경 서문 내용은 아래입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망각하지 않고서
졸음을 쫓으면서(바늘로 허벅지 찔렀다는 말임) 부모에게
효를 다 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6년 만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최치원에 대해 유학생활 이야기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치원과 두 처녀귀신이야기입니다.
최치원이 투숙했던 초현관 앞에 무덤이 2개 있었는데요.
그 무덤 2개는 자매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시집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긴 무덤인데요.
그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이 시를 바쳐 그 처녀귀신들을
위로 했다고 합니다.
시 내용은 아래입니다.
“고운 그대들을 꿈에서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길고 긴 밤 이 나그네를 위로하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소.
외로움이 사무치는 이 숙소에서
운우의 정(구름이 녹아 비가 될 만큼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행동:운우지정)
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귀신이 되어서도 사랑을 나눴다는 옛사람의 노래를 이어서
부르고 싶소“
한밤중에 자매가 최치원의 시를 듣고 최치원을 꿈에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3사람이 밤새도록 시문을 나누며 놀았다고 하는
일화입니다.
쌍녀분 설화라고 합니다.
최치원은 당에서 9급정도의 현재 벼슬에 만족하지
않고 승진할 계획을 하며 노력을 하는데요.
마침 황소의 난이 당에서 일어나 승진 기회가 막히게
됩니다.
그리고 황소의 난(875~884)을 제압하던 고변 사령관 밑으로 들어가
거기서 문필가로 활약합니다.
그러던 중 격황소서라고 유명한 글을 쓰는데요.
황소에게 항복하라고 보낸 글입니다.
내용은 아래입니다.
“너는 자세히 들어라
너의 몸뚱이는 도끼날에 기름이 되고
뼈는 수레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권속들은 베임을 당할 것이다.“
위의 시도 중국에서 유명한 시라고 합니다.
당시 최치원은 고변 줄을 타고 있었는데요.
고변이 황소의 난 제압하는데 실패하고 실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도교에 고변이 깊이 빠져
승진기회를 보던 최치원은 비전이 안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진골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헌강왕이 유학파를 활용하려고 했는데요.
그런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옵니다.(29세)
위의 책은 계원필경과 최치원 동상입니다.
최치원에 대해 신라에서의 활동할 때 이야기입니다.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 후 신라 헌강왕 측근에서 실제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계원필경이라고 당시 당나라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를 받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헌강왕과 함께 일을 하는데요.
헌강왕이 죽고 진성여왕일때는 전북 정읍(태산군)이나
부성(충남 서산)으로 지방관에 파견되기도 합니다.
당시 권력은 중앙에 있어서 중앙에서 활동해야
제대로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고 지방관은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진성여왕은 성추문에 휩싸이는 등 진골귀족들과의
권력싸움이 어려운 상황이고 난도 일어나는 상황이라
정말 힘든 상황이었는데요
그때 최치원이 그 유명한 시무 10여조를 들고 개혁안이라고
진성여왕에게 바칩니다.
시무 10조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요
당시 시급한 현안에 대한 개혁방안이었는데요
대대적인 개혁은 아니고 왕실 입장이 절충된 내용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최치원은 6두품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까지 승진합니다.
그리고 진골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무 10여조는
시행되지 못합니다.
이후 후삼국시대가 열리고요 897년 진성여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해인사로 들어가고요 훗날 최치원도 해인사에
들어갑니다.
이상 최치원에 대해 알아보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능력 좋고 정의로운 사람이 그 능력에 맞게 자리를
갖는 게 백성들은 좋은데요.
당시 폐쇄적인 계급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으로의
한계를 느끼고 결국 재야로 가신 최치원 선생님이십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해 평등한 세상을 계속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갰습니다.
민주주의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