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에 대해 알아봅시다

토정 이지함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님은 토정비결이란 책으로

우리들에게 유명하신 분이신데요

토정 이지함 선생님은 어떤 일이 계셨고

토정비결은 그에게 어떤 책이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사진이 토정 이지함 선생님 초상화와

토정비결 책입니다.

 

토정비결은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사용되는 책인데요.

주역을 바탕으로 쓰인 것이나 주역은 4(생년, , , )

를 통해 점을 치나 토정비결은 3(생년, , )을 기준으로

144괘의 점을 치는데 사용되는 책입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님은 점치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로 박학다식

하신 분으로 추측되는데요. 토정유고란 책의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토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율려(음악), 산수, 소리에

능했다. 그리고 관상, 신방과 비결에 통하지 않았던 분야가

없었다.“

 

이지함의 예지력은 당시에 유명했다고 합니다.

어디서부터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선조수정실록 11

이지함은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와 길흉을 알아맞히곤 했다.“

 


영조실록 30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지함의 유집을 보건데...

10여 년 뒤에 천하가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하여도 세상에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니...“

토종유고 내용은 아래입니다.

지함이 답하여 이르기를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르게 함이 있을 것이다.“

 

별동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위와 같이 예언 했는데요

15년 뒤에 진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토정 이지함이 처가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요.

그때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큰 화가 미칠 것이오.“

라고 얘기를 하며 처가댁을 뜨는데요.

그 후 장인이 역모 일에 휘말려서 토정 이지함 처가댁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합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1517년 충청도 보령 출생이고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의 6대 손입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집안 사람이라고도 하고

왕실과 혼인을 맺을 수 있는 집안이라고 합니다.

 

토정 이지함은 절친 이었던 안명세가 기록을 하다 을사사화

를 비판했는데요.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 일 이후 벼슬길에 오를 생각을 안 하고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고 합니다.

 


위에 표시된 곳이 토정로입니다.

서울에 토정로라고 있는데요.

그 토정이 이지함 선생의 토정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마포는 한강 물길을 이용해 물건들이 오가던

요충지 이었는데요

거기서 흙을 싸고 토굴을 만든 후 그 위에 정자를 만들어서

토정이라는 말이 붙게 된 것이랍니다.

 

토정 이지함은 서민들하고도 격식 없이 대화를 하곤 했는데요.

서민들뿐만 아니라 서경덕, 이이, 이황등 최고의 학자들하고도

교류를 하곤 했습니다.

 

어우야담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지함이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만 개나

되었다. 그것을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천석에 이르렀다.“

그리고 장사해서 번 곡식 천석은 다 서민들에게

다시 나눠줬다고 합니다.

 


위의 표시된 지역이 포천입니다.

그러다 토정 이지함은 유일이라고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 책이 있는데 그것으로 벼슬길에

오릅니다. 포천 현감으로 벼슬살이를 시작 하셨는데요.

당시 포천은 극심한 빈곤에 휩싸였을 때입니다.

그래서 민생을 구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상소로

임금께 건의 하는데요

받아들여지지 않아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둡니다.

 

토정 이지함이 임금께 바쳤던 상소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전라도 만경현에 고기잡이 할 수 있는 섬이 있고

황해도 풍천부에 소금을 구울 수 있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들을 임시로 빌려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방랑생활을 해서 어디 지역에서

뭐가 많이 나오고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셔서

저런 상소문을 올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저런 상소문을 올리신 것입니다.

 


위에 표시된 곳이 아산입니다.

5년 뒤 1578년에 아산 현감으로 다시 부임을

하십니다.

당시 토정 이지함 선생만한 인재가 없어서 또 등용된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아산에서 걸인청을 만들어

밑바닥 층의 농민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주고

볏짚으로 짚신 만들고 판매 같은 직업교육을 시킵니다.

그래서 그런 기술들을 배워 백성들이 벌어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1578년 토정 이지함 선생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십니다.

석담일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합니다.

읍민이 애도하기를 친척의 상을 당한 것같이 하였다.”

 

마지막으로 반전을 말하겠습니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 선생이 지은 책이 아니랍니다.

당시 토정 이지함 선생이 유명하니까 책이 잘 팔리게 하기

위하여 토정이란 말만 빌려 쓴 것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는

1.이지함의 시문집 (토정유고)에 토정비결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2. 조선 후기 세시풍속지 <경도잡지><동국세시기>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당시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던 조선이었는데요

토정 이지함은 상업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의 사상들이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상 토정 이지함 선생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를

갖았습니다.

점은 그냥 재미로 보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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