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종에 대해 알아봅시다

고려 정종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고려 정종은 고려의 3대왕으로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천도하려다 실패 한 왕입니다. 재위기간은 4년이었고 죽은 후 왕위를 동생인 광종에게 넘겨줘 광종이 고려 4대왕이 됩니다. 고려 2대왕인 혜종에게는 아들이 있어 원래대로라면 혜종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데요. 정종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삼촌입니다. 조선시대의 세조느낌입니다. 이런 고려 정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위에 보이시는 것이 고려 태조 왕건 가계도와 고려 정종 그림입니다. 2대왕이 혜종 무이고 3대 왕인 고려 정종의 원래 이름은 왕요 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 왕소가 4대왕 광종이 됩니다. 2대왕 혜종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고려 정종이 힘으로 왕을 하게 되고요 고려 정종에게도 아들이 있었지만 그 동생 왕소에게 왕위를 물려줘 고려 4대왕 광종이 됩니다.

 


고려 2대왕 혜종은 즉위 2년 만에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9459월 승하) 당시 혜종은 흥화군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후 배다른 동생인 고려 정종이 고려 3대왕이 됩니다.

 

혜종이 왕위에 있을 때부터 왕요와 왕소형제는 혜종의 정치 라이벌이었습니다. 혜종은 이복동생인 왕요와 왕소형제를 믿고 잘해주는등 자기 딸을 왕소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자국이 있다는 일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당시 유력 호족 중에는 혜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고 왕요와 왕소 형제가 오히려 지방 호족들에게 혜종보다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왕후 가문인 충주 유씨, 황주 황보 씨, 정주 유씨 등은 결탁해 혜종에게 반대하는 세력으로 있었습니다.

 


위의 지도는 대동강 위치입니다.

당시 국경방어를 위해 대동강 유역은 고려 최정예 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요. 이 지역은 왕식렴이란(왕건 사촌)분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왕식렴이 왕요 왕소를 지지하고 있어서 당시 고려의 가장 강력한 세력은 2대왕 혜종이 아니라 왕요 왕소형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혜종의 장인인 왕규는 당연히 혜종 지지 세력인데요. 왕규가 혜종에게 왕요 왕소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혜종은 듣지 않습니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사 열전 왕규 왕규는 왕의 동생 왕요와 왕소가 모반한다고 참소했으나 혜종은 무고임을 알고서 동생들에게 더욱 두터운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혜종을 암살하려고 자객이 혜종 방에 밤에 들어오는데요. 혜종에게 잡힙니다. 그래서 그 배후는 왕규라고 판정이 나는데요. 이상한 사항입니다. 자객이 혜종을 죽이러 와서 왕위 즉위하고 2년 만에 죽을 정도로 몸이 약한 혜종에게 붙잡힌 것도 이상한 사항이고요 그 배후세력을 왕규라고 했는데 왕규는 혜종의 장인으로 혜종이 좋아야 자기도 좋은 세력입니다. 이런 왕규를 배후로 지목한 것도 이상한 사항입니다. 이것은 다른 세력이 왕규세력을 처내기 위한 계략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배후 세력으로는 후에 왕이 된 고려 정종 왕요와 광종 왕소을 유력한 용의자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려 2대왕 혜종이 죽자 서경에서 왕식렴이 군사를 일으키고 개성으로 와 왕규를 죽이고 왕요가 3대왕 고려 정종이 됩니다. 왕규를 죽인 명분은 혜종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인데요. 누가 봐도 거짓 명분이고 왕위를 빼앗기 위한 행동입니다. 실제로도 2대왕 혜종의 아들이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왕요가 다음 3대왕인 고려 정종이 되었습니다.

 

3대왕 고려 정종은 초기에는 열심히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때로는 촛불을 밝혀 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였고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정사를 듣고 결정하였습니다.”

 


위의 지도는 평양(서경)을 구글어스로 본 것입니다.

고려 정조는 즉위한지 2년 만에(947) 서경 천도를 추진합니다. 서경을 수도로 하려면 성이라든지 부대시설 같은 것들이 많이 필요한데요. 그런 것들을 만드는데 엄청난 노동력이 듭니다. 백성들이 그 노동에 끌려 나가 혹사당하고 농사도 못 지어 농사를 망치고 세금도 못내는등 원망이 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성에 밀집되어있는 기득권 세력들도 다 반발하고 있어 서경 천도는 추진하다가 실패하게 됩니다.

 

고려 정조가 서경천도를 추진하려던 이유는 서경(평양)에는 이러타할 호족세력이 없어 왕권을 더 강화시킬 수 있고 풍수지리 적으로 한반도에서 서경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인데 고구려 수도가 평양이었어 서 그랬습니다. 이런 이유로 서경 천도를 추진한 것입니다.

 

9489월 고려 정종은 여진족 사신을 접견하다 날씨가 갑자기 변해 벼락이 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쓰러집니다. 그 후 고려 정종은 병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동생인 왕소에게 왕위를 물려 줘 왕소가 고려 4대 왕 광종이 됩니다. 고려 정종이 벼락 치는 것에 그렇게 크게 놀란 이유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를 보았기 때문에 그 죄책감을 늘 가지고 있다가 벼락이 칠 때 지레 놀랬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려 정종은 아들 경춘원군이 있었는데 동생인 왕소가 왕이 됩니다. 고려 정종이 죽기 2달 전에 고려 정종의 최대 후원자 왕식렴이 죽고 바로 고려 정종이 죽으며 왕이 아들도 아닌 동생 왕소에게 간 것입니다. 이 부분이 고려 정종의 죽음은 동생 왕소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될 수 있는 부분인데요. 형제가 틀어진 것이라면 가장 큰 이유는 고려 정종의 서경천도로 꼽고 있습니다.

 

이상 고려 정종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왕권을 갖기 위해 싸워서 개성인구의 반이 죽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피를 보았습니다. 왕의 자리는 정말 살벌한 자리입니다.

민주주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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