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에 대해 알아봅시다

묘청의 난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묘청의 난을 최근 1천 년간 제일 큰 사건이라고 기록하셨는데요. 묘청의 난이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그런 기록을 남기셨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묘청은 고려시대의 승려인데요. 서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분입니다. 이런 묘청과 서경(=평양)지배 세력들이 고려의 수도를 개경(=개성)에서 서경으로 옮기려다 실패하고 잘못돼 난을 일으킨 것이 묘청의 난(1135, 고려 인종 13)입니다.

 


위의 사진 위는 묘청의 난을 일으킨 묘청 동상과 아래 그림은 묘청의 난이 일어난 국제정세도입니다.

묘청세력은 고려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했으며 그에 반대되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세력은 개경에 고려 수도가 그대로 있기를 바랐으며 금나라에 사대를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묘청(자주) <-> 김부식(사대)의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위의 국제정세도에 보는 것처럼 당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전성기를 맞이하여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의 수도를 정벌하여 고려가 사대하던 송까지 남쪽으로 이동하여 남송으로 있던 시기입니다. 여진족은 원래 고려에 사대하던 곳인데 이런 신하의 나라가 갑자기 강성해져 동북아를 평정한 상황입니다. 고려인들은 여진족을 아래로 봤는데 금나라가 너무 강성해져 고려가 여진족에 사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자 자존심도 상하고 있었는데요. 묘청의 난을 일으킨 묘청 세력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는 것과 함께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묘청의 목표는 아래의 3가지입니다.

1. 고려 수도를 서경으로 천도한다.

2. 칭제건원(왕을 황제로 칭하고 독자 연호사용)을 한다.

3. 금나라를 정벌한다.

 


위사진은 평양 위성사진()과 개경(아래) 위성사진입니다. 아무래도 큰 강이 흐르고 있는 평양(서경)이 풍수지리 적으로 더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당시는 풍수지리를 많이 믿었던 상황인데 풍수지리 적으로 서경이 좋다고 주장하고 고려왕인 인종을 위해 서경에 대화궁을 완공하고 인종이 다녀가게 하는 등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런데 인종이 서경에 갈 때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등 안좋은일이 계속 일어나자 인종은 서경으로 천도를 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묘청의 난을 일으킨 묘청은 큰 떡 속에 기름을 넣고 대동강에 집어넣어 기름이 조금씩 나오는 것(물 색깔이 무지개처럼 됩니다)을 용이 침 흘린다고 소문내기도 했는데요. 인종이 물속을 정탐하게 하여 떡으로 계략을 한 것이 들통 나는 등 서경천도를 안하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었습니다.

 

고려 인종은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1135)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대장으로 세워 서경천도 세력 진압에 들어갑니다. 형세가 불리해자 묘청의 난을 일으킨 묘청 파는 내분이 일어나 묘청은 같은 편인 조광이라는 인물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조광은 사람을 시켜 묘청 목을 왕에게 보내는데요. 고려왕은 그 묘청 목을 가져온 사람을 처벌을 합니다.

 


위의 그림은 김부식 초상화()와 그의 저서 삼국사기(아래)입니다.

이것을 본 조광은 자기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다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요. 김부식이 1년간의 싸움 끝에 묘청의 난 세력을 진압합니다.

 

신채호 선생님이 제일 아깝게 생각한 사람은 묘청이 아니라 윤언(윤관 장군님아들)입니다. 윤언은 서경천도에는 반대하고 칭제건원에는 찬성했는데요. 그것이 탁월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윤언이라는 사람도 제거 되었고 그 사대주의 정신이 조선시대까지 타고 내려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항 때문에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최근 1천 년간 제일 큰일로 평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 묘청의 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탁견이 있으면서도 정세에 휩쓸려 아까운 인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폭넓게 사고하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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