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실체 에 대해 알아봅시다

명성황후 실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사람은 공이 있고 과가 있습니다. 살면서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는데요. 여기서는 기록상에 나와 있는 내용을 통해 명성황후의 공과 과를 알아보며 명성황후 실체 를 살펴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초상화는 명성황후 초상화지만 맞는 것은 아니고 현대에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입니다. 아래 사진도 명성황후 사진으로 퍼졌지만 역사학자님은 명성황후 사진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명성황후는 16세에 고종과 결혼하는데요. 그렇게 명성황후가 되는 데는 흥선대원군의 조력이 큰 작용을 했습니다. 당시는 세도정치가 득세하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세도정치를 타파하는 시기인데요. 이 시기에 왕비를 잘못 앉히며 다시 세도정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자기 처갓집과 친척뻘인 민 씨 집안에서 왕비를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처음엔 사이가 좋았지만 나중에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명성황후 역시 자신 집안사람들을 중앙과 지방 요직에 앉히는 등 왕비로써는 드물게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등의 이유로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틀어집니다. 그리고 외국문물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명성황후 의 선진문물을 받으들이자는 개화사상에서도 충돌하여 둘의 사이는 원수처럼 굉장히 틀어집니다. 흥선대원군의 사주로 추정되는 사건인, 명성황후 친정댁 집안이 폭발사고 전부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할 정도로 사이가 틀어지게 됩니다.

 

명성황후 실체 의 권력을 잡는 면에서 명성황후의 주도로 자신의 같은 계열인 여흥 민 씨가 중앙과 지방의 권력을 잡게 됩니다. 근데 당시는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갈라지던 시기인데요. 그래서 여흥 민 씨들은 고종을 선택할지 흥선대원군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여흥 민 씨들은 고종을 선택하고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명성황후를 뽑아줘서 권력을 여흥 민 씨들이 잡을 수 있었던 건데 그 부분이 화나서 명성황후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것입니다.

 

명성황후 실체 에 기록된 사항은 민영익 이라는 명성황후 세력인 분이 자신의 부상을 치료해준 외국인 알렌이라는 분에게 10만 냥을 주었다고 합니다.(현재돈 대충 50억 원 정도, 당시 국가 총 세입이 480만 냥이었습니다.)

 

또 당시 민형식이라는 개인이 끌려 들어와 쓴 세금이 70만 냥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국가 재정을 민 씨 집안이 주물럭주물럭 하며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상황이었습니다.(국가예산의 1/7정도)

 

민 씨 집안은 저렇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국가재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왕비 집안이라는 명목으로 저렇게 많은 국가재정을 사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래는 릴리어스 언더우드라는 외국인이 쓴 명성황후 실체 관련 기록입니다. 조선견문록 중

명성황후는 누구보다도 국익을 위해 헌신한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습니다.”

 

이사벨라 비숍 이라는 외국인이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중 기록입니다. “나는 명성황후의 우아함과 매혹적인 몸가짐, 보기 드문 지성과 박력에 놀랄만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명성황후가 접촉한 외국인 여성분들에게 칭송을 받았는데요. 실제로 명성황후는 정치력과 외교력 수완이 좋아 미국과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먹기 위해 결국은 명성황후를 시해해야 했을 정도로 명성황후의 존재감은 컸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다음과 같이 명성황후 실체 에 대해 기록 하였습니다. “대원군이 10년간 쌓은 국부를 순식간에 탕진한 여자

 

서유견문을 쓴 저자이자 개화사상가 유길준 은 명성황후 실체 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우리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나쁩니다.”

 

이렇게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은 극과 극을 달려 명성황후 실체 를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명성황후 실체를 알아보는 절정은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 이야기일겁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본으로부터 이루어진 그 때 흥선대원군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맞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시해사건에 관여한 것은 아니고요 일본이 흥선대원군 손자를 죽이려고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궁에 들어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 흥선대원군이 망설이다가 예전보다 2시간 늦게 궁궐에 입궐했는데요. 그래서 밝을 때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서 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목격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본 짓인 것이 소문 난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 일본 계획은 캄캄할 때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흥선대원군이 그 자리에 있을 때 자기들은 어두울 때 빨리 궁궐을 나가는 것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늦게 궁궐에 입궐하는 바람에 사람들한테 들킨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 명성황후 실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명성황후 가 정치나 외교적인 면에서 능력이 있었던 것은 맞는다고 보지만 어렸을 때부터 궁에서만 살아서 검소함이나 일반 백성들의 삶은 잘 알지 못하셨던 거 같습니다. 명성황후도 사람이기에 학습을 해야 알 수 있지요. 이런 점을 참고로 우리 사회의 지도자는 일반 서민들의 삶도 잘 이해하고 고생도 해보신 분들이 적당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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