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에 대해 알아봅시다

궁예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궁예는 신라 말기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를 세웠던 인물입니다.(857년 ~ 918년) 우리가 많이 아는 고려를 세운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다가 역모를 일으켜 성공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어 고려를 세운 것입니다. 궁예는 신라왕의 버려진 아들로 묘사되는데요. 신라 47대 왕인 헌안왕과 후궁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고, 신라 48대왕인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어 확실한 것은 미스터리인 상황입니다.

 

 

위의 그림은 후삼국 세력도입니다.

궁예는 857년 5월 5일 출생이고 태어난 순간 지붕 위에 흰 빛이 서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지금의 기상청 관리직정도 되는 분(일관)이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 “이 아이가 오(午) 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합니다.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오니 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멀리 던졌다고 합니다. 그때 밑에 있던 여종이 아이를 몰래 받았는데 잘못 받아서 손가락으로 아이 눈을 찔러 한쪽 눈이 실명된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여종이 궁예를 몰래 키웠는데요. 궁예가 10살 때 장난이 너무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모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에 있습니다. 삼국사기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는데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궁예는 울면서 어머니의 근심 걱정거리가 안 되겠다고 하고 출가를 합니다.

 

궁예 뜻은 한문으로 弓裔로 활을 가진 자의 후예란 뜻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용하는 예명이 본명처럼 사용된 예로 보고 있습니다. 궁예는 스님입니다. 그래서 법명도 있었는데요. 법명은 선종(禪宗)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선종 불교가 대중적 신앙이었는데요. 특징은 엄격한 교리보다는 기도와 참선을 중시하는 불교입니다. 궁예는 수원 승도라고 해서 절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던 하층계급이 되어 절 잡일이나 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생활을 합니다.

 

궁예는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성인 되어 큰 야망을 갖습니다. 삼국사기 “궁예는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까마귀가 사과 조각을 궁예에게 떨어트렸는데 그 사과 조각에 왕(王) 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궁예는 마침내 절에서 나와 도적 무리로 투신합니다.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10 “892년 궁예는 북원(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도적 양길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고.... 병사를 주었다.”

 

궁예는 양길의 부하로 있으면서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는데요. 연전연승을 하여 세력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섭니다.

 

889년 정도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왕위 다툼이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지방까지 돌볼 틈도 없었고, 지방이 국가적으로 운영이 안되었습니다. 그때 궁예 세력이 연전연승을 하며 맹위를 펼쳐 후 고구려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도 신라 조정에 등을 돌린 상황인데요. 그때 궁예가 나타나 전투에선 연전연승을 하고, 골품제를 배격하는 등 평등사상을 펼쳐 백성들의 신망까지 두텁게 받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궁예같이 지방의 세력가를 호족이라고 하는데요. 호족은 궁예나 후백제의 견훤처럼 큰 호족도 있고, 중소 호족들도 많았습니다. 큰 호족을 중심으로 후 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과 함께 본래 나라인 신라 이렇게 후삼국시대가 열렸습니다.

 

송악을 거점으로 활약했던 호족 중에 왕륭이던 분이 계셨는데요. 이분이 자기는 나이도 많고, 얼마 살 것도 같지 않아서 자기 아들을 궁예 휘하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아들이 왕건인데요. 왕건도 궁예 휘하에 있으면서 전쟁에 연전연승을 하며 세력에서 중요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위의 그림이 궁예가 철원에 건설한 도성 설계 그림입니다.

궁예는 큰 세력을 갖춰 901년 스스로 왕이 되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904~911) 하고, 독자 연호 무태를 사용했습니다. 905년 철원으로 천도하기로 계획을 잡고 철원에 대규모 도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 대규모 도성이 지금은 DMZ지역이라 제대로 연구가 안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궁예는 904년, 911년 두 번의 관직 제도 개편을 추구했는데요. 그 중요 내용은 신분보다는 실력으로 관직을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신라의 골품제도라는 기존 사상을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마진은 마하진단의 약자입니다. 마하=크다, 진단=동방 그래서 대동방국 이란 뜻입니다. 911년 후에는 마진에서 태봉으로 국호를 바꿉니다.(911년 ~ 918년) 그래서 지금도 철원 가면 상점들 이름에 태봉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915년 궁예가 왕위에 오른 지 14년 후 궁예의 정비 강 씨가 궁예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제대로 심문도 안 하고 관심법이라고 해서 독심술로 생각을 읽었다고 해서 강 씨가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쇠고챙이를 뜨겁게 한 후 강씨 음부에 찔러 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도 같이 죽였습니다. 강 씨는 강력한 호족 세력의 딸입니다.

 

궁예는 왕건에게 관심법으로 보니 역모를 저지르려고 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건이 그렇다고 생각 잠깐 했었다고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살려줬다고 하는데요. 이런 일들이 겹치면서 궁예가 호족 출신들을 언제든지 제거할 것이라는 행동들로 여겨져 다른 호족 세력들이 뜻을 모아 왕건을 앞장 세워 궁예를 제거한 것입니다.

 

궁예 관련 죽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태조 세가 “궁예가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후삼국 시대 궁예는 큰 호족 출신입니다. 하지만 다른 권력자들인 대중소 호족들도 권력의 자리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른 대중소 호족들을 배려하지 않고, 독점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궁예를 죽음으로 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궁예 다음 왕인 왕건은 29번이나 결혼하면서 모든 대중소 호족들까지 보듬는 행동을 했습니다. 호족들이 궁예를 버리고 왕건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상 궁예에 대해 살펴보는 자리를 갖았습니다. 아무래도 역사는 승자 기준으로 쓰이다 보니 궁예가 왕건의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났는데요. 궁예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폭정을 심하게 한 정도는 아닌듯합니다. 평등하게 정치를 하려고 했지요. 궁예의 죽음은 당시 시대적으로 권력자들이 궁예보다는 왕건을 더 왕의 적임자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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