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에 대해 알아봅시다

공민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공민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입니다. 그래서 공민왕 관련 주요 자료는 고려사라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역사서에 나오는 것입니다. 고려사가 조선시대에 작성한 역사서이다 보니 조선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고려 마지막 왕 공민왕을 더 안 좋게 기술한 것은 계산하고 공민왕을 평가하시면 되시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공민왕 가계도입니다.

드라마에 보면 정도전하고 공민왕 하고 만나서 개혁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씬도 많이 나오고 하는데요. 그런 것들은 거짓입니다. 정도전은 공민왕 11년(1362년)에 고려 과거시험에 급제하는데요.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미관말직일 텐데 왕을 그렇게 만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공민왕과 정도전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씬이 나오는 것은 두 분이 워낙 유명하신 분들이니까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 장면입니다.

 

 

태종, 세조같은 묘호는 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만들어서 올리는 이름입니다. 근데 고려시대의 원 간섭기 때는 시호라고 해서 왕이 죽은 후 중국의 원나라 황제가 이름을 내려줬습니다. 그런 왕 이름이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같은건데요. 원나라에 충성하라고 충이 붙은 이름들을 원나라가 죽은 고려왕들에게 내려줬습니다.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나도 고려는 묘호를 올리지 못하고, 시호를 계속해서 받았는데요. 이번엔 명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공민왕이 죽은 후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가 ‘공민왕’입니다.

 

공민왕은 12세부터 10년간 원나라에서 볼모로 생활했습니다. 공민왕은 왕가 사람이라 고려가 딴짓 못하게 원나라가 인질로 오게 한 것입니다. 원나라는 고려의 왕을 만들기도 하고, 폐위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장자 계승의 고려왕을 잇는 법칙은 가능한 준수 해가면서 고려 왕을 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공민왕 전 왕인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이 제대로 못하니까 복위 시키기도 하고, 폐위시키기도 계속 하다가 좀 유능한 고려 왕이 필요해서 공민왕을 원나라가 특별히 임명한 것입니다.

 

유능한 왕이 필요했던 이유는 공민왕 전 왕이었던 충정왕의 외척들이 사리사욕만 채우면서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가서인 이유도 있고요. 충정왕 외척들이 친원세력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해 나가서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왜의 노략질이 극심해서입니다. 왜는 1350년 이후 급격히 세력이 커져 정규군 수준의 약탈자로서 고려를 다 잡아먹고 원까지 공격할 수 있을 것으로 원이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고려왕을 원이 원했습니다.

 

1349년 공민왕은 원에 볼모로 붙잡혀 있던 시절에 원 황족의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합니다. 별다른 정치적 기반이 없던 공민왕은 공주와의 결혼으로 원 황실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공민왕은 왕이 되자마자 변발, 호복 폐지를 하였습니다. 변발은 원이 그렇게 하라고 한적은 없는데 조선 사람들이 원나라 사람처럼 머리 중심만 기르는 머리를 한 것인데요. 그것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호복도 원나라식 옷인데 그것도 금지시켰습니다. 그것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원에 대한 공식적인 반감의 뜻은 아니다고 할 수 있고, 국내에서는 왕의 반원 의지를 드러내는 조치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공민왕은 1356년 5월 본격적인 반원정책을 시행하는데요. 기철(기황후 오빠)등 친원 세력을 연회 베푼다고 궁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다 죽였습니다.

 

이 당시 홍건적의 난이 중국에 있었는데요. 이민족 왕조인 원을 타도하고 명나라 창건의 계기를 만든 종교적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머리에 빨간 두건을 쓰고 전투를 했다고 해서 홍건적이라고 합니다. 이때 원이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는데요. 그래서 최영 장군 등 고려 장군들이 원병으로 홍건적의 난 진압에 투입되었습니다. 그 때 최영 장군 등이 원나라 군대와 같이 작전을 하면서 원나라가 군대가 생각보다 별로 세지 않다고 공민왕께 보고 합니다. 거기서 공민왕은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감을 잡았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은 쌍성총관부 위치입니다.

공민왕은 위에서 말한것처럼 기철을 죽이고 1356년 5월 18일 정동행성 이문소라는 사법 임무를 담당한 친원세력의 근거지가 있는데요 거기를 폐지를 합니다. 또 같은날 쌍성총관부 공격을 시작합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화주 이북의 고려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관입니다. 2달동안 전투해서 이겼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1356년 5월 18일 기철 제거,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공격 시작 이 3가지를 한꺼번에 합니다. 3가지라 4지선다에서 나오기 좋은 사실입니다.

 

공민왕은 위의 반원 운동뿐만 아니라 그 이후도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일국갱시라고 해서 나라를 다시 새롭게 한다는 표어를 내겁니다. 정치. 경제 등 모든 사회 분야에서 개혁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공민왕은 단순한 반원운동이 아니라 반원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원나라 황제 집안인 노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원나라는 공민왕의 반원운동을 2달 뒤에 알았습니다. 노국대장공주는 그래서 원나라 사람이긴 하지만 고려의 국모로써의 이미지가 더 있습니다.

 

1365년 노국공주는 난산으로 사망합니다. 그래서 공민왕의 슬픔이 컸는데요. 노국공주 영전을 만드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공사하다 사고 나서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또 노국공주가 죽은 후 공민왕은 잠시 방탕하게 사는데요. 그동안의 모든 정치는 승려 신돈에게 맡겼습니다.

 

공민왕릉은 노국대장공주와 같이 안치되게 만들었습니다. 북한 개성 봉명산에 있습니다.

 

신돈은 옥천사 여종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따돌림도 당하고 당시로써는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었는데요. 공민왕이 그를 파격적으로 중용하여 자기대신 정치를 이끌게 한 것입니다.

 

신돈을 통한 공민왕의 개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기득권 세력 물갈이 – 과거제도를 시행해서 과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하지만 당시에 부정부패가 많아 돈 주고 과거급제를 하는 사례가 정말 많았습니다.

2. 성균관 부활 – 이때 정도전이나 정몽주 같은 인재들이 발굴됨, 신진사대부의 등장

3. 전민변정도감 – 과전법이라는 조선 토지 개혁의 밑바탕이 됨

 

공민왕이 신돈을 버리는 시기는 신돈의 권력이 공민왕의 권력을 넘어서려는 순간입니다. 그때 공민왕은 신돈을 제거하였습니다.

 

1374년 공민왕은 익비가(공민왕의 제3 비)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환관 최만생이 이 소식을 공민왕에게 전합니다. 임신시킨 사람은 자제위 홍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이 홍륜을 죽이라고 명하고 환관 최만생이 관리 못한 죄라고 최만생도 죽일 것이라고 엄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최만생과 홍륜이 이야기를 하여 같이 공민왕을 죽입니다.

 

자제위는 공민왕이 신변 호위 및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고위관료 자제를 선발해 궁중에 두었던 사람들입니다.

 

자제위 홍륜과 환관 최만생의 범행을 밝힌 것은 이인임입니다. 그래서 이인임이 사태를 수습하고, 최고 실권자가 됩니다.

 

이상 공민왕에 대해 살펴보는 자리를 갖았습니다. 왕을 제거하는 대부분은 왕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나 같이 놀던 권력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왕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보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말 중요한 것이지요. 민주주의를 지킵시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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