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만들어진과정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참고한 자료는 ‘역사저널 그날 73회’입니다. 1770년(영조 46년) 과거시험에서 박지원 선생님 은 1차 시험을 1등으로 합격 하십니다. 그러나 2차 시험에서 백지를 내십니다. 이렇게 박지원 선생님은 과거시험에서 1차는 합격 하시고 2차 시험은 백지로 내는 행동을 몇 번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몰라서가 아니라요 부정부패에 찌들대로 찌든 과거시험장에 항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박지원 선생님은 1차 시험에서 대부분 높은 점수로 합격해 기존 벼슬아치 들이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미리미리 접근 했다 고 합니다. 그런 현실도 거부감을 가지고 계셨다 고 합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국어책에서도 나오시고 국사책에 도 나오시는데요. ..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 생활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 생활은 자신에게는 크나큰 시련이었지만 한국의 역사관점에서는 대단히 유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유배 생활동안 엄청나게 많은 저술활동을 함으로써 실학을 집대성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학문을 발전 시켰습니다. 이런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 생활을 들여다보는 글을 적겠습니다. 정약용의 손위 형인 정약종이 천주교를 믿었던 것이 발각 되면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형제관계 였던 정약용과 정약전도 천주교를 믿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정약종이 발각된 문서에는 정약용에게 천주 교일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 등의 문서도 포함되서 정약용은 사형을 면하게 됐지만 남인에서 워낙 핵심 인물인 관계로 정적..
정약용 선생님에 대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굉장히 뛰어난 인재인 정약용 선생님도 정조라는 좋은 왕이 안계셨으면 지금과 같은 업적을 이루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정약용 선생님이 어떻게 벼슬살이를 했는지 거기서 정조의 역할이 어땠는지가 포인트입 니다. 위의 사진은 정약용 선생님 초상화와 목민심서 그리고 거중기를 그린 그림입니다. 위의 시가 정약용 선생님이 7살 때 지은 시랍니다. 원근법을 표현한 시인데요. 짜장면이나 생각하고 있을 나이에 저런걸 시로 쓰다니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 같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의 아명은 귀농인데요. 당시 정약용선생님의 아버지께서 벼슬을 하시다가 정치적 일로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끼시고 시골로 가셨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이랍니다. 당시 정치판은 노론이 득세하던 상황이었고 정약용 선생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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