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에 대해 알아봅시다

한명회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명회(1415년~1487년)는 영화 관상에도 나오는 인물인데요. 수양대군을 세조라는 왕으로 만들어준 책략가입니다. 본인도 조선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까지 했고요.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유정난이 왕을 몰아낸 일이라 부관참시라고 해서 한명회 시체가 목이 잘리는 처벌도 받은 인물입니다.

 

 

위의 아래 그림은 한명회의 압구정 정자 그림입니다.

세조는 1455년 6월 11일 즉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냈는데요. 그것에 대한 두뇌 역할을 한 것인 한명회입니다.

 

 

한명회 하면 유행어가 있는데요. “이 손안에 있소이다.”입니다. 그것에 대한 실록 기록이 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세조실록 25권 “한명회가 주상의 신임하는 바가 되어 팔도의 군사를 통솔하고 형벌과 상 주는 것이 손안에 있었다.

 

다음은 한명회 외모 관련 기록입니다. 한명회의 신도비명 中 “얼굴이 잘나고 키가 커서 바라보면 위대하였고 규모와 기개가 우뚝하여 무리에서 돋보였다.”

 

한명회는 칠삭둥이라 외모를 좀 왜소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요. 실제로는 크고 잘생겼다는 기록입니다.

 

다음은 한명회 어렸을 때 관련 기록입니다. 성종실록 209권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가난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한명회 집안은 당대에 손꼽히는 명문가였습니다. 한명회 증조부 한수란 분은 고려 시대 대학자였고요. 할아버지 한상질과 한상경은 조선 개국공신입니다. 한명회는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인 한상덕의 양자로 들어가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명회는 과거급제 기준으로 공부 머리는 좀 부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8세에 관직 진출을 하는데요. 경덕궁직입니다. 경덕궁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던 개성 사저인데요. 그 경덕궁을 관리하는 담당자로 관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과거급제가 아니라 음서로 들어간 자리인데요. 음서는 명문가 집안의 자식에게 과거 없이 그냥 벼슬을 주기도 하는 제도입니다. 그런 제도로 38세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양에서 개성 출신 관리들 모임을 하면 한명회를 무시하고 따돌렸다고 합니다.

 

한명회와 같이 공부한 분은 권람과 서거정이 있는데요. 두 분 모두 과거급제했는데 한명회는 못 하였습니다.

 

한명회가 그렇게 38세 1452년 경덕궁직을 시작으로 계유정난이 성공하여 1466년에는 조선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까지 합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에서만 공신이 아니라 4번 1등 공신을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훈장이 4개가 있는 것입니다. 정난공신 1등(1453년), 좌익공신 1등 (1455년), 익대공신 1등(1468년), 좌리공신 1등(1471년) 합니다.

 

한명회는 친구인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과 만납니다. 수양대군의 마음을 산 이유는 말솜씨로 보고 있습니다. 말솜씨가 좋았다고 하는데요. 간결하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였다고 합니다.

 

 

다음은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보고 한 말입니다. 한명회의 신도비명 中“수양대군은 활달하기가 한 고조와 같고, 영무한 성품은 당 태종과 같으니…….”

 

계유정난은 1453년 10월 10일 일어납니다. 수양대군은 먼저 대신인 김종서의 집을 들러 김종서를 죽입니다. 그 후 새벽에 모든 대신들에게 급한 일이라고 궁으로 부른 후, 살생부에 기록한 인물들은 모두 죽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명회 설계하에 수양대군은 왕이 되었습니다.

 

한명회가 저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력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주선하에 무신들하고 매우 친했는데요. 궁을 지키는 내금위(조선 전기 왕의 친위부대, 당시 무인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선발) 무신들하고도 매우 친해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명회의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도체찰사로 활동 – 왕의 명을 받아 지방을 관할, 감독하여 수령 등의 비리나 부정부패를 처벌, 백성을 구휼하는 관직입니다. 14년간 총 14회 활동했고요. 한해에 평균 90일, 많게는 300일 이상을 도체찰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세조의 정책 시행에 큰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2. 북방, 변방 방어 전문가로 활동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대책을 만들어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3. 외교의 달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외교 현안들을 잘 해결했다고 합니다.

 

세조 13년 한명회의 넷째 딸이, 자을산군과 결혼하는데요. 자을산군이 성종입니다. 자기보다 3살 많은 형을 제치고 한명회의 후광을 업고 왕이 됩니다.

 

한명회는 권력뿐만 아니라 부도 어마어마했는데요. 중국 황제에게 뇌물을 줄 정도로 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명회는 또 당시로는 유일하게 압구정에 개인 정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치가 좋아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1481년(성종 12년) 명나라 사신이 압구정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는데요. 그래서 한명회가 왕실에서 사용하는 천막(용봉차일)을 빌려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성종이 화나서 안 된다고 했는데요. 한명회가 그러자 부인이 아파서 명나라 사신 왔을 때 못 나갈 것 같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로 성종과 틀어지고, 다른 한명회를 안 좋아하던 신하들도 기회가 와서 한명회를 물어뜯었습니다. 이 일로 한명회는 관직에서 쫓겨납니다.

 

한명회는 73세에 사망합니다. (1487년 성종 18년) 그로부터 7년 뒤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한명회가 죽자 평소에 한명회 집에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텅 비었다고 합니다.

 

이상 한명회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맞긴 하지만, 자기 조카를 죽이게 한 일 때문에 전 한명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도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사람이 욕심에 가득 차 욕심 때문에 자기의 조카를 죽인 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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