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 에 대해 알아봅시다

문정왕후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문정왕후는 명종의 어머니입니다. 명종은 조선의 13대 왕으로 중종의 아들입니다. 출생은 1534년 사망은 1567년입니다. 명종의 이복형인 인종이 왕 된 지 1년 만에 갑자기 죽자, 명종이 12살의 나이로 왕이 됩니다. 명종은 상당히 어릴 때 왕이 된 것인데요. 그래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명종이 20살 될 때까지 수렴청정합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에 참여했던 인물이라 역사적으로 다루는 데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수렴청정은 왕실의 여자 어른이 어린 임금 대신 정치하는 제도입니다.

 

문정왕후 관계도

 

아래는 문정왕후 관련 실록 기록입니다.

명종 20년 4월 6일 “윤 씨(문정왕후)가 주상을 함부로 꾸짖어 마치 민가의 젊은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했다. 왕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기지 않고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때로는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왕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 비(문정왕후)는 사직의 죄인이라 할 만하다. <<서경>> 에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였으니 윤 씨(문정왕후)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위의 기록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날 사람들이 기록한 평가입니다. 위의 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시면 안 되고요. 성리학 세상이던 조선에서 여성으로서 정치에 참여하여 좋지 않게 사림파들에게 보이기도 했고요. 2번의 사화로 문정왕후가 사림파 사람들을 대거 숙청합니다. 그래서 사림파 사람들에 의해 기록한 실록에서 문정왕후를 최대한 비판한 것입니다.

 

위의 그림이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을 당시 관계도입니다. 문정왕후는 딸만 3명 낳다가 34살에 아들인 명종을 낳습니다. 그때 이미 중종은 인종이라는 20살 아들을 세자로 둔 상태였는데요. 그래서 왕위계승 순위 1위가 인종이고, 왕위계승 순위 2위가 명종이었습니다. 이러니 세자이던 인종 세력과 명종 세력은 왕위 자리를 두고 대립이 일어났는데요. 인종의 어머니는 장경왕후 윤 씨고, 문정왕후는 문정왕후 윤 씨입니다. 둘 다 윤 씨인데요. 인종이 명종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인종 세력을 큰 윤 씨 세력, 명종 세력을 작은 윤 씨 세력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인종이나 명종은 아버지가 같은 중종이라 아버지 세력은 1개이고 다툼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다릅니다. 그래서 인종 세력은 인종의 외가댁 세력인 큰 윤 씨 세력이고, 명종 세력은 명종의 외가댁 세력인 작은 윤 씨 세력입니다. 이렇게 인종의 외삼촌들과 명종의 외삼촌들이 대립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종은 20살이고 세자였지만, 명종은 1살이었습니다. 당연히 인종이 왕이 되겠지요. 그래서 큰 윤 씨 세력이 작은 윤 씨 세력과의 대립에서 이겼습니다. 인종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종이 왕이 된 지 1년 만에 갑자기 죽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던 작은 윤 씨 세력의 명종이 12살의 나이로 갑자기 왕이 됩니다.

 

아래는 명종 즉위년 8월 29일 기록입니다.

“윤원형(명종 외삼촌 작은 윤 씨 파) 등이 대비(문정왕후)에게 참소하기를 ‘윤임(인종 외삼촌 큰 윤 씨 파)이 반드시 역사를 시켜 대군을 해치려 할 것이니 삼가 보호하여 화를 피함이 마땅합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대군(명종)은 매일 저녁 잘 때는 몰래 고각으로 옮기고 또 늙은 궁인을 문 앞에 누워 있게 했는데 위급한 경우가 있게 되면 궁인이 대신 죽도록 하기 위함이다.”

 

당시 큰 윤 씨 파와 작은 윤 씨 파 대립이 너무 심각하여 왕 즉위 서열 2위인 명종이 인종 세력에 의해 살해 당할까 봐 위의 기록처럼 자는 곳을 계속 바꿔가며 대비를 할 정도로 살벌하게 두 세력은 대립하였습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고 윤원형(명종 외삼촌, 문정왕후 동생, 작은 윤 씨 파)에게 밀지를 보내서 큰 윤 씨 파를 척결합니다. 명종이 왕이 되긴 했으나 권력 서열 2위인 큰 윤 씨 파가 문정왕후의 작은 윤 씨 파에게는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거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밀지는 비밀리에 내리던 명령인데요. 조선은 공개적인 시스템 체제하에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하였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일을 꾸민 것입니다. 정상적인 국정이 아니라 문정왕후의 사심으로 큰 윤 씨 파에게 역모 누명을 씌어 제거한 것입니다.

 

 

큰 윤 씨를 척결하는 과정에서 사림파도 같이 화를 입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생겨 사림파가 문정왕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을사사화라고 합니다. 을사사화란 1545년 소윤이 대 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위의 사진은 양재역 벽서를 재구성한 모습입니다.

이후 양재역에서 벽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양재역은 현재의 양재역 맞습니다. 지금은 양재역이 지하철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양재역에서 말을 빌려 탈 수 있고, 이동자들을 위한 숙식 시설도 있고 그랬습니다. 현재의 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공간이었습니다. 이 양재역에 문정왕후를 비판하는 빨간색 글씨의 벽보가 붙습니다. 양재역 벽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여주(여자왕, 문정왕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문정왕후도 위의 양재역 벽서사건을 알고 위의 글도 알게 되는데요. 그래서 정미사화가 일어납니다. 정미사화는 1547년 소윤 세력이 남은 대 윤 세력을 숙청한 사건입니다. 이래서 문정왕후에 의해 2번의 사화가 일어납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정치를 하는데요. 최측근에 환관 박한종이 있었습니다. 박한종은 내수사라는 조선 시대 왕실 재정관리를 위해 설치된 관서 우두머리로 일하는데요. 환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공신으로도 책봉해주고, 품계도 종2품까지 되고, 밀성군이라고 하는 봉군까지 하는 특혜를 받습니다.

 

문정왕후는 남성 관료들보다 환관들하고 더 자유롭게 접촉하며 정치를 해나갔습니다.

 

내수사는 원래 승정원이라는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을 거쳐서 문정왕후와 교류를 해야 하는데요. 문정왕후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내수사가 문정왕후에게 직접 보고를 하게 만듭니다. 이 말은 문정왕후가 내수사에 직접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내수사가 제2의 권력기관처럼 되는데요. 박한종의 내수사에 의해 왕실은 많은 부를 쌓게 됩니다. 정상적으로 부를 쌓은 게 아니라 백성들 재산을 그냥 뺏어서 부를 쌓은 것인데요.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내원당이라는 왕실 절이 있는데요. 이게 원래 100개 정도가 있었는데 내수사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400개로 늘어납니다.

 

권력자들이 백성들 재산을 뺏으면 그걸 막아줘야 할 왕실이 스스로 백성들 재산을 빼앗으면서 부를 쌓은 것입니다.

 

조선은 성리학 국가입니다. 하지만 불교도 일반 백성들은 많이 믿었습니다. 유교에서는 사후세계 같은 것들에 대한 것을 설명해주지 못했는데요. 불교는 사후세계도 설명해줄 수 있고, 일반 백성들은 불교를 믿으며 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 국가라 불교를 배척하였는데요. 문정왕후는 불교를 장려하여 일반 백성들이 더 잘 불교를 믿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550년에 문정왕후가 중종 전반기 때 폐지되었던 선종과 교종을 다시 세웁니다. 그리고 그때 일종의 승려 자격증인 도첩제를 부활하는데요. 그리고 승과 시험을 다시 개시합니다. 승과 시험을 보고 합격한 사람 중 임진왜란 때 맹활약하셨던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은 분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이상 문정왕후 관련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국가는 공개적으로, 정해진 절차대로 돌아가야 하지요. 한국 사람들은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결과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더 올바르고 깊이 있게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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