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집권 과정에 대해 알아봅시다 –서울의 봄 시기-

전두환 집권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죽으며 대한민국은 민주화 바람이 붑니다. 이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던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 합니다. 요즘 영화로 나와서 유명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고바우 만평이라고 신문에 실리는 풍자만화입니다. 당시 위의 만화는 결국 신문에 실리지는 못하는데요. 당시 상황을 풍자한 그림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트리에 별 2개가 별 4개보다 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두환이 당시 2 스타였고 국방부 장관 정도가 4 스타입니다. 전두환이 국방부 장관보다 높다는 것을 풍자한 만화입니다. 밑에 2개는 문어 보이실 것입니다. 문어가 대머리인데요. 전두환을 뜻하는 것입니다.

 

 

서울의 봄 시기에도 유신헌법과 비상계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훈풍을 느낄 수 있었던 것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합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희생되었던 사람들이 정치인들은 복권이 되고, 교수들은 복직이 되고, 학생들은 복교가 됩니다.

 

이때 가택연금에 있던 김대중도 가택연금에서 해제가 되고요. 국회에서 제명당한 신민당 총재 김영삼도 복귀가 됩니다.

 

바로 이 서울의 봄 시기에 전두환은 군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 집권 나라를 위해 몰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왜 전두환이 몰래 걸어갔냐면, 당시 4 스타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네가 뭔데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근데 전두환은 2 스타라서 함부로 대통령이 된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는 길로 걸어가지만, 겉으로는 대통령 생각 없다고 이야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생각이 없는 사람은 소문으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고 수군수군하면 그냥 무시하고 말 것입니다. 전두환은 대통령 된다고 소문이 나자, 공개연설을 통해 자기는 대통령 안 한다고 했는데요. 그러면서 K-공작계획을 세웁니다.

 

K-공작계획이란 1980년 3월 신군부(전두환 군부)가 전두환 집권을 위해 언론 회유하는 공작을 시행한다는 보고서인데요. 어떤 전략으로 언론을 장악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될지 묘사한 보고서인데요. 이게 1996년 공개됩니다. 이렇게 전두환은 겉으로는 대통령 안 할 거라고 발표도 하고 하지만 뒤에선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략도 세우고 일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위의 보고서가 K-공작계획 보고서입니다. 최종 결제자는 전두환이었습니다.

 

보고서 내용은 언론을 조작하여 현재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는 열세로 포장하고, 안정과 안보가 중요하게 보이게 이끌기로 되어있습니다. (군부에 유리하기 위해)

 

이를 위해 전두환 집권 목표 세력은 언론인 94명을 공작 대상으로 포섭합니다. 3차에 걸쳐 총 40명으로 공작 범위를 축소합니다.

 

 

위의 사람은 허문도라는 사람인데요. 언론인입니다. 저 사람이 전두환과 결탁하여 언론을 조작하는 데 실무적으로 앞장선 사람입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부 내에 언론반을 조직하여 그 언론반 안에서 k-공작계획을 수립합니다. 이것 관련 보고서는 남아있어서 전두환이 이미 서울의 봄 시기부터 대권을 노리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두환은 그리고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됩니다. 중앙정보부장은 법적으로 2개 이상의 직위를 겸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려면 군대에서 제대해야 했습니다. 근데 전두환은 만약에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군인으로 계속 있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군인으로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장도 하고 싶어서 중앙정보부장 서리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어 실질적인 중앙정보부장도 맡았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은 당시 대한민국 서열 2위의 자리입니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이 됨으로써 국내 모든 정보를 장악할 수 있었고요. 국무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보안사령관으로 있어도 어느 정도 충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의 핵심 매리트는 막대한 예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짜장면 500원 하던 시절에 한해 중앙정보부 예산이 800억 원 정도였습니다. 이런 막대한 돈을 전두환 집권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800억 중 약 120억 원을 전두환은 정치 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전두환 집권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몇 있었습니다. 첫째로 당시 정치계의 핵심인 3김이었는데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전두환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3명이 서로 대통령 되겠다고 싸우고 있던 시절이라 전두환까지 생각을 못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 3김 세력은 전두환을 막지 못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도 전두환을 견제할 수 있었는데요. 최규하 대통령은 사람이 너무 착한 것인지, 능력이 모자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두환을 견제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전두환 집권을 견제하던 유일한 세력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정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요. 계엄 해제, 유신헌법 철폐,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대규모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 학생회도 부활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조직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고, 언론을 조작하다 보니까 일반 사람들은 대학생들을 안 좋게 보고 대학생들의 시위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위의 사진은 대학생들이 당시 서울역 인근에서 대규모 집회를 하는 모습입니다.

 

서울역 인근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대규모로 하는데요. 당시 시위대 1명이 버스 1대를 탈취하여 경찰을 향해 돌진합니다. 그래서 경찰 1명이 죽는데요.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대학생들은 시위를 멈추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서울의 봄 분기점인 서울역 회군이라고 하는데요. 이다음 날은 1980년 5월 16일에 김영삼과 김대중이 회동을 합니다. 그래서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하루빨리 개헌을 함께하기로 합의합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20일 비상계엄 해제를 위한 국회가 소집할 예정이었는데요.

 

전두환 집권을 위해 전두환이 이때 한 발 더 빨리 나가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를 전국적으로 합니다. 이전에도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황이었는데요. 이때 제주도는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령 구조도가 대통령 – 국방부 장관 – 계엄사령부였는데요. 5월 17일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돼서 국방부 장관이 빠지고 대통령 – 계엄사령부로 명령 계통이 마련해집니다.

 

또 1980년 5월 17일 휴교령이 내려지고, 전두환 입장에서 제일 위협적인 김대중과 김종필은 이런저런 혐의를 씌워서 체포하고요.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시킵니다. 또 국회는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데요. 그럴 수 없도록 국회를 군대로 봉쇄합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다시 전두환 집권을 하는 독재의 암흑기로 들어갑니다.

 

이상 전두환 집권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참 물 없이 고구마 먹은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전두환 욕을 많이 하고 싶지만, 그러면 블로그가 안 좋아질 수 있어서 참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군인들 교육 똑바로 하고, 조심해야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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