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에 대해 알아봅시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에 성공합니다. 이럼으로써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되는 발판을 만들었는데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기 위해 열사 두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인데요. 저 두 분의 열사 중 박종철 열사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여기서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건물이 바로 경찰 치안본부로 사용하던 남영동 그 건물입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으로 끌려갑니다. 안기부의 남산, 군 보안사의 서빙고와 함께 경찰 치안본부의 남영동은 고문 때문에 악명이 높던 장소입니다.

 

 

남영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회전 계단이 있습니다.

 

 

위의 모습인데요. 저 회전 계단은 2, 3, 4층하고 연결되어 있지 않고, 1층과 5층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 계단으로 가면 자기가 몇 층에 가는지도 알 수 없이 바로 고문실이 있던 5층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이 고문실 내부 모습인데요. 오른쪽이 침대, 왼쪽이 책상과 의자입니다. 그리고 빨간색 원이 욕조인데요. 일반 욕조보다 길이는 짧고 높이는 높게 만들어서 물고문에 특화하게 만든 것입니다. 박종철 열사가 저 욕조에서 물고문 당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침대는 자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몇 날 며칠 잠을 안 재우면서 취조를 해 저 침대 보면서 무너지라고 침대를 놓은 것입니다.

 

박종철은 피의자 신분이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저곳에 끌려간 것입니다. 박종철하고 친한 동아리 선배가 있는데요. 그 선배가 경찰들의 목표였습니다. 박종철은 그 선배와 며칠 전에 만나기도 하고, 박종철 누이가 떠준 목도리를 그 선배에게 건넬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 선배의 위치를 경찰들은 알고 싶던 건데요. 박종철이 그 선배의 위치를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무튼 경찰들은 그 선배의 위치를 알기 위해 박종철 열사를 고문했습니다.

 

 

위의 사진이 박종철 열사 사진입니다. 박종철 열사는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인데요. 학과에서 학생회장을 하기도 하고, 많은 집회와 시위에 참여해 징역과 구류를 살기도 한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아래는 박종철 열사가 21살 때 감옥에 있으면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1986.7.8.

“우리 앞엔 외면할 수 없는 역사와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이 있습니다. 꼭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 특히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이 땅의 현실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합니다.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박종철을 고문한 경찰들은 고문 기술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지 않는 기준선을 알고 거기에 맞게 고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당하다 죽자,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심장 쇼크사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겉으로 보기엔 이렇게 우연한 일처럼 보이는데요. 실제로는 필연적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이 건대 사건 당시 농성하는 대학생들 모습입니다.

당시 전두환 독재에 반대하던 학생들의 반대 시위는 엄청났습니다. 한 예로 1986년 10월 28~ 10월 31일 건대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대학생들이 애학투련이라는 조직 결성식을 건국대에서 한 것입니다. 정부가 10월 31일 헬기까지 동원해서 농성 중인 학생들을 모두 체포합니다. 이때 체포된 대학생 숫자가 1,525명입니다. 저 중 1,288명이 구속됩니다.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이 구속된 숫자입니다. 3.1운동 때도 단일 사건으로는 저렇게 많이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직후인 1986년 11월 3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국대 사건을 공산 혁명 분자 폭력 난동 사건으로 명칭을 통일...”하기로 합니다. 전두환도 이 보고를 받아서 대학생들을 집회 및 시위 관련 법률로 걸지 말고, 방화, 파괴, 침입 등의 죄목을 적용하도록 지시합니다. 당시 안기부장이던 장세동은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구속된 학생 중 한두 명 정도에게는 사형 선고도 고려하라”

 

이 정도로 대학생들 같은 민주 세력과 전두환 정권의 대립은 극심했습니다. 3월에 대학교 개강을 하니까 1987년 1월에 미리미리 대학생들 운동권 세력을 타진하기 위해 청와대도 명령하고 내무부 장관도 남영동에 방문하는 일등이 일어났습니다. 이러니까 남영동 경찰들은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고, 당시 박종철 열사 아니더라도 누구든 고문하다가 죽일 분위기였습니다.

 

1987년 1월 15일 박종철 열사 사망 다음 날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에 의해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신문에 처음 보도됩니다.

 

 

위의 사진이 당시 보도된 신문 모습입니다. 윤전기가 돌아가는 것을 세워서 실었다고 합니다.

 

그 후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와 박종철 열사 시신을 처음 확인한 중앙대병원 의사 오연상도 물고문 정황을 밝혀냅니다. 당시 의사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닥이 물로 흥건했습니다. 욕조가 있었고요. 폐에서 수포음도 들렸습니다.”

 

 

위의 분이 박종철 열사 부검을 한 황적준 박사님이신데요. 국가의 압력과 회유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분도 “경부 장기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사료됨”이란 감정서를 내놓습니다.

 

고문에 의한 사망을 짐작하게 하는 감정서입니다.

 

당시 보도지침이란 것이 언론사에 있었는데요. 정부에서 언론사들 국가 입맛에 맞게 보도하라고 내린 지침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언론들이 신문에 연일 물고문 기사를 내놓습니다.

 

당시 부검의의 메모가 공개되면서 사건을 은폐하며 관계없다던 강민창 치안 본부장이 구속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건 5일 만에 강민찬 치안 본부장이 고문 시인 발표를 합니다. 1987. 1. 19.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 의욕으로 인해 발생한 불상사....”

 

1987년 2월 7일 박종철 열사 추도식을 합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분열되어 있던 민주화 운동 세력들이 이 행사에 결집합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야당, 재야인사, 학생 운동권 세력이 아닌 일반 시민 72,674명도 국민 추도회 발기인에게 참여합니다.

 

1987년 3월 3일 박종철 열사 49재를 하는데요. 고문 추방 민주화 국민 평화 대행진이라는 행사를 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6월 항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래는 전두환의 말입니다.

“정치란 힘 가진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원리요. 그걸 가급적 모양 좋게 끌고 가려 해서 그렇지. 힘 가진 사람이 정치를 자기 뜻대로 못 한다면 바보 가운데서도 제일 바보야.”

 

저렇게 생각하던 대통령입니다. 하늘이 얼마나 어두웠을지 짐작이 됩니다.

 

 

위의 사진이 이부영 기자입니다.

당시 동아일보 해직 기자인 이부영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교도소에 있었는데요. 교도관의 제보로 고문 경찰이 더 있다는 사실을 입수합니다. (처음 발표 시에는 2명만 고문에 가담했다고 경찰이 발표했습니다.)

 

당시 대공 수사관들이 교도소에 있는 경찰 2명과 면회하러 왔는데 교도소 보안계장이 접견 참석을 해 이 내용들을 다 듣고 다 기록합니다. 그것을 위에서 이야기한 이부영 기자에게 전하고요. 이부영 기자는 그것을 토대로 정의구현사제단에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실에 대해 편지를 씁니다. 그래서 그 편지는 다른 교도관에 의해 정의구현사제단에게 전달됩니다.

 

김승훈 신부님은 그것을 가지고 성명서를 쓰고 발표합니다.

 

그럼으로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폭로가 되고요. 전두환 정부는 버티지를 못합니다. 고문에 직접 가담한 경찰 3명과 사건 은폐 조작한 박처원 치안감 등 3명을 구속시킵니다.

 

이 정도로 민심이 수습되지 않으니까 개각을 합니다. 노신영 국무총리, 정호영 내무부 장관, 김성기 법무부 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전두환의 최측근인 장세동 안기부장이 5월 말에 해임됩니다.

 

저렇게 정부 내각이 잠시 균열이 생긴 사이 1987년 6월 항쟁이 터진 것입니다. 실제로 정부는 6월 항쟁 때 행동이 엇박자를 내는 등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고문 관련으로 구속된 경찰들은 3~5년의 길지 않은 형기에서 가석방으로 일찍 풀렸다고 합니다.

 

이상 1989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피인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정말 박종철 열사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깊고 행동도 굉장히 용감한 거 같습니다. 저도 보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엎어버리려는 사람은 언제든 존재합니다. 잘 싸워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파이팅!!

 

아래는 1987년 또다른 기폭제인 이한열 열사 사건 관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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