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업적을 알아봅시다

연개소문 업적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장수인데요.

연개소문 업적은 역시 당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것이지만 결국 고구려를 망하게 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연개소문의 업적과 어떻게 그가 권력을 잡았는지

나중에 고구려는 어떻게 망했는지 간단하게 알아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연개소문 얼굴 그림과 중국 경극에서의

연개소문을 표현한 배우입니다.

 

642년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총감독 관으로 임명되어

요동으로 떠나기 전 대규모 사열식이 열리는데요.

그 자리에서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평양에 있던 100여명의 귀족들을 살해하고

평양성으로 들어가 영류왕(고구려 27대왕)까지

죽입니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장을 허수아비 왕으로

앉히고(고구려 29대 보장왕) 자신이 인사권이나

군권을 장악하고 통치를 합니다.


 

영류왕과 고구려 귀족들은 연개소문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의 중심 평양에서 멀리 있는 요동으로 보내기 위해

천리장성 책임자로 연개소문을 임명하고 떠나보내려

는 데요 이를 안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대로(지금의 총리급)

이었습니다. 최상급 귀족출신인데요 연개소문도 대대로를

물려받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면

나라 사람들이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연개소문을 미워하였으므로 그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개소문 집안이 대대로 최고 권력을 독점하니까

다른 귀족들이 견제를 하였습니다.

이를 안 연개소문은 왕과 신하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데요. 그래도 왕과 귀족들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평양에서

떠나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위사진은 천리장성과 각 성들의 위치, 당이 침투한 경로

그림과 천리장성사진입니다.

 

그 당시 중국의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을

때인데요. 처음엔 고구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다시 쳐들어옵니다.

당 고조는 고구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다음 왕인 당 태종(이세민)이 고구려를 쳐들어옵니다.

당의 침공 명분은

1. 수나라의 복수입니다.

2. 신라(당과 우호관계) 공격에 대한 징벌입니다.

3.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의 제거입니다.

4. 가장 실질적인 이유는 동북아의 패권을 갖는 것입니다.

 

645년 드디어 고당전쟁이 발발합니다.

당나라가 쳐들어간 것인데요. 당 태종(이세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 것입니다.

당시 당나라 부대는 나름 세계에서 실전경험이 많은

최고의 군대였습니다.

처음에 고구려의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을 수일 만에 함락하고요

안시성에서 막히게 됩니다.

 

고당전쟁은 연개소문에게 승리와 패배를 떠나서

이득이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불안정한 집권을 하고

있었는데요. 전쟁으로 이런 집권력이 강화되었고요

연개소문을 반대하는 지방 귀족들의 힘을 소모시키는

역할도 되었습니다. 유명한 안시성 전투의 안시성주도

연개소문을 반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저 고당전쟁하면 유명한 것이 안시성 바로 앞에

흙을 쌓아 안시성 높이만큼 올려서 그 위에 올라가

활을 쏘는 당의 전술이 있는데요.

그 토산을 거의 쌓았을 때 비가와 가지고 흙들이 안시성

쪽으로 무너져 내려가 안시성과 토산이 연결되었는데요.

그것을 따라 고구려 군이 토산을 점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고구려군은 수비에서 공격적으로 싸우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전쟁은 가을에 시작해 겨울이 다가와서 추웠는데요

이런 이유로 당은 후퇴하게 됩니다.

 


위의 그림은 안시성 CG로 복원한 모습과 설연타라는

나라의 위치입니다.

 

또 당의 뒤쪽에 위치한 설연타라는 나라가

있었는데요. 연개소문이 설연타 나라 칸에게 재물을

받치며 당을 공격할 것을 설득하여 설연타가 당의

장안근처를 공격하기도 하여 위협을 느껴 후퇴한 것도

있습니다.

 

당이 후퇴할 때 후퇴 경로가 늪지대였답니다.

그래서 당 태종(이세민)이 직접 장작을 날아가며 일할정도로

힘들고 급박하게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 후 당태종은 병을 얻어 앓다가 죽게 되고요(649)

중국에서 평가는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다 망했지만

당태종은 나라는 보존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고구려에 대해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 경극에서도 연개소문은 당태종을 쫓는 역할인데

무서우면서 위엄이 있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송나라 신종이 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기지 못했는가?“ 하자 왕안석이 대답하기를

개소문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 태종이 죽으면서 유언을 하는데요. 유언내용은

아래입니다.

나의 자식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너희들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당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라고 했답니다.

 

연개소문 업적은 안시성 전투뿐만 아니라 사수 전투라고

662년에 2차 고당전쟁에서 당나라군을 몰살한 것도

있습니다.

 

인조 7년의 승정원일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비록 찬역한 도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적수가 없는 효웅입니다.‘

그러나 역시 연개소문 업적의 빛을 바래게

하는 일은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가 망했다는

것인데요.

 

연개소문의 아들은 남생, 남건, 남산이 있었습니다.

이중 첫째인 남생이 권력을 물려받으려고 하는데 남건과 남산이

반대하여 남생은 당으로 도망가는데요.

후에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남생이 길잡이 역할을

하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고구려는 망하게 됩니다.(668)

또 남생이 당에 투항하자 요동이나 만주지역의 세력들이

고구려를 이탈하여 당에 투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다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이런

독재정치로 민심은 연개소문을 떠났다고 하고요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동맹제안을 거절하여

나당연합이 만들어지게도 하고요

달라지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대응도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킬 때 귀족 100여명을 죽였는데

그중에는 브레인들과 수나라와의 전쟁경험이 있는

인재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다 죽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가져할 덕목은 공공성입니다.

공적인 기반에서 국가 시스템을 운영해아 하는데요.

연개소문은 권력을 사적으로 독점하여 결국 고구려를

망하게 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이상 연개소문 업적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박근혜와 최순실도 공공성이 아닌 사유화로 나라를

운영했는데요. 역시 그동안 나라 운영은 개판이었지요.

 

연개소문 업적과 문제점에서 현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수 배웠습니다.

한민족 방파제 고구려 감사합니다.!!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