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공주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딸이자, 세종의 손녀, 단종의 누나, 수양대군(세조)의 조카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조정에 피바람이 일어나게 한 사람인데요 이런 피바람 속에 단종의 누나였던 경혜공주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위에 보이시는 것이 문종의 가계도입니다. 문종은 세종 다음 왕이었는데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왕이 단종이고 단종보다 7살 많은 경혜공주가 있었습니다. 경혜공주와 단종의 어머니는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문종은 왕후를 새로 들이지 않아 경혜공주와 단종은 새어머니가 없었습니다.
경혜공주는 정종(왕아님 이름임)과 결혼 하는데요 결혼하자 문종은 한양에 집 30채를 헐고 거기에 경혜공주가 살 집을 지어줍니다. 서울 양덕방 향교동 지금의 북촌 인근입니다. 그 집에 단종도 자주 놀러 갔는데요. 단종이 경혜공주집에 놀러갔을 때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죽이고 계유정난을 일으킵니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단종 보좌세력을 살해하여 제거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경혜공주집으로 가 단종에게 살생부를 주며 제거할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자 단종은 허락하고 수양대군은 단종 보좌세력들을 제거합니다. 경혜공주집은 아무래도 궁궐보다는 수비가 허약한지라 그런 점을 노리고 그때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은 의정부영사, 이조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를 다 겸직하고 집현전에도 자기를 찬양하는 교서를 지으라고 합니다. 그 후 수양대군은 반대파들을 계속 제거 합니다. 금성대군이라고 세종의 여섯째아들이 계셨는데요. 이 분이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다고 결국 수양대군에 의해 역모 죄로 귀향을 갑니다. 이 금성대군과 한편에 섰던 분이 정종(경혜공주 남편)입니다. 그래서 정종도 유배를 가는데요. 이때가 경혜공주 21살 때입니다. 이때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정종을 원래 영월로 귀향을 보냈었는데요. 경혜공주가 세조에게 자기 아프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뜻은 자기가 자살하겠다는 뜻이었는데요 그러면 민심이 세조에게 안 좋게 됩니다. 그래서 세조는 정종의 유배지를 영월에서 양평으로 옮겨줍니다. 그 후 단종이 세조에게 말을 전하는데요. 세조실록 1455년 6월 17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혜공주가 그 병을 내게(단종) 고해 왔는데, 그의 의중이 아마도 정종을 돌아오게 하려는 것 같다” 이 말뜻은 양평으로 유배지를 옮긴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매형을 누나에게 돌려보내라는 단종의 말이었는데요 수양대군은 정종을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 후 경혜공주가 병석에 일어나자 정종을 다시 김포근처로 유배를 보냅니다. 이때 민심과 여러 가지 눈들이 많아서 정종과 함께 경혜공주도 같이 유배지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민심을 의식하느냐 음식등 신경도 써줍니다.
그 후 1456년 단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세조를 축출하려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이 후 정종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을 지방 관아로 다 보내버리고 정종의 재산도 몰수합니다.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정종을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보내고 경혜공주도 남편 따라 갔다고 합니다.
그 후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된 후 사약이 내려져 죽게 됩니다. 그 후 정종에 대한 감시가 더 심해지는데요. 경혜공주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주가 따라가 있으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렀는데 일반 사람들도 감당해 내지 못할 바였다 그런데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아녀자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더욱더 경건하게 하며 해이하지 않았다”
경혜공주는 광주에 있을 때 (경혜공주 25살) 아기를 낳습니다. 정종은 광주에서 불교에 심취하는데요. 세조실록 1461년 7월 26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영양위(정종)가 외인과 교통하며 담을 넘어 불러들인 형상을 보건대 잡인들과 상통한 것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정종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고문들 당하는데요. 정종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조실록 1461년 8월 22일 “내가 충신이 되어 주상께 죄를 받았으니 어찌 아픔이 있으리오...빨리 상은을 입고자 할뿐” 자기 죽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종은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당시 경혜공주는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경혜공주는 그 후 순천의 관비(관청 노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혜공주 자식들도 다 노비가 되게 되었는데요. 그 후 경혜공주가 출산을 할 때 세조가 환관을 보내 딸을 낳면 데려오고 남자를 나면 목 졸라 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조의 아내(정희왕후)가 환관을 다시 불러서 아들인데도 데려오라고 다시 명령 합니다. 경혜공주는 아들을 낳는데요. 환관이 데려와서 여자아이처럼 옷을 입혀 키웠다고 합니다.
그 후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고(의경세자는 단종보다 먼저 죽음) 세조 후손들이 젊었을 때 줄줄이 요절했습니다. 그리고 세조는 피부병을 굉장히 심하게 앓았다고 하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세조가 죽였던 사람들에 의해 저주가 받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그랬는데요 세조의 업이라고 불렸답니다.
위의 사진은 경혜공주와 정종의 묘인데요. 같은 곳에 만들어졌습니다. 동그랗게 큰 봉분이 경혜공주 묘고 조그마케 네모난 것이 정종의 묘입니다. 정종은 능지처참을 당하여 시체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그 밑에는 정업원의 터에 정업원이 있던 곳이라고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경혜공주는 자식들을 궁궐에 맡기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를 합니다. 경혜공주가 들어간 곳은 정업원이라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도성 내에 있었던 여승방입니다. 단종의 부인이 정순왕후인데요. 정순왕후도 출가해서 정업원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경혜공주는 궁궐의 백어리니 라는 유모를 믿고 자식들을 맡겼는데요. 백어리니는 경혜공주의 유모이기도 해서 믿을 수 있어 자식들을 맡겼다고 합니다. 백어리니는 실록에도 총명하고 현실감각이 있는 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어리니는 경혜공주의 자식들만 키운 것이 아니라 성종도 같이 키웠다고 합니다. 경혜공주의 자녀들이 성종과 이런 식으로 죽마고우가 된 것입니다.
경혜공주는 4년간의 승려생활을 끝으로 궁궐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세조를 찾아가는데요. 당시는 세조 11년 4월입니다. 세조 병이 가장 심했던 시기입니다. 두려움이 떨 덴데요 이 때 경혜공주가 찾아갑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종실록 1469년 1월 29일 “정종의 아들과 경혜공주가 입궐하여 알현 하니 세조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눈물을 뿌리시고 나로(예종) 하여금 전지를 쓰게 하시어 연좌시키지 말도록 하셨으니...” 경혜공주 자식들을 노비에서 면천 시켜줬다는 내용입니다. 경혜공주 아들 이름이 정미수인데요. 세조가 지어줬다고 합니다. 오래 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후 세조는 경혜공주에게 집과 토지 절을 줍니다. 이 후 경혜공주는 아들과 함께 세조에게 자주 문안인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는 15세에 돈년부 직장(종 7품)에 발탁됩니다. 그 후 6개월 만에 경혜공주는(39살) 죽게 됩니다.
경혜공주는 세조를 용서함으로써 자기 자식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용서의 힘이네요 그렇다고 어설프게 하면 안 되고 용서도 잘해야 합니다. 악인은 뒤통수를 처서라도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생각만 하면서 잘못 용서 하면 더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용서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요 나쁜 사람에게는 나쁘다고 말을 해야 덜 나빠집니다. 나쁜 사람에게 착하다고 하면 더 나빠질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바입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