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업적에 대해 알아봅시다

신사임당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신사임당 업적은 화가로써 뛰어난 그림 등을 남긴 것과 율곡 이이라는 걸출한 학자를 키워 낸 것인데요. 이런 신사임당 업적과 함께 신사임당의 생애는 어떠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신사임당은 5만원 지폐의 주인공인데요. 현모양처라는 한국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고요 사임당은 당호입니다. 신사임당의 대표작은 초충도이고 율곡이이가 주인공인 5천원권의 뒤에 있는 그림이 신사임당의 초충도이고 5만 원권 지폐 뒤에 있는 그림은 신사임당 그림이 아니라 동시대에 살았던 어몽룡이라는 사람의 월매도와 이정이라는 사람의 풍죽도입니다.

 


위의 사진이 5만권 지폐에 있는 신사임당 사진과 신사임당의 업적으로 불리는 대표작 초충도 8점입니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유교적인 국가라 여성들의 사회생활이 많이 제한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신사임당의 그림은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굉장히 유명하게 많이 퍼져 신사임당의 업적인 화가로서 능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신사임당은 원래 산수도와 포도그림을 잘 그리기로 당대에 유명했는데요 신사임당이 죽은 100년 후 송시열이 신사임당을 재조명하면서 유교성향이 가속화된 당시 상황에 맞춰 여인네가 산수도를 잘 그리는 것은 마땅하게 여기지 않아(산수도를 그리려면 돌아다녀야해서요) 초충도가 유명해집니다.

 

송시열은 서인 노론인데요. 당시 서인의 학문적 바탕이 되는 율곡 이이에 관하여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율곡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도 같이 재조명하게 되었습니다. 숙종 같은 경우도 신사임당의 그림을 모사(원본을 보고 복제한 그림) 한 그림을 붙여놓고 감상합니다. 당시는 신사임당의 그림을 모사한 그림도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사임당이 살았을 시 신사임당의 그림이 퍼진 경로는 남편 이원수의 5촌 당숙들(이기 이행)이 최고의 권력가였는데요 그런 이기 이행에게 신사임당 그림이 넘어가 당대 문인들에게 신사임당 그림이 퍼졌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이 신사임당 업적인 산수도와 포도그림입니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는 당시 신사임당의 그림을 자랑스러워 했을 정도로 신사임당 그림에 호의적이었고요 신사임당의 친부모님(아버지이름이 신명화입니다.) 역시 조선시대치고는 사고가 열려있던 분들이라 신사임당이 재능을 갈고닦을 수 있도록 배려를 많이 해줬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900년 초 대한제국은 일본과 을사늑약을 맺고 일본은 전쟁터로 한국 남자들을 많이 보내려고 합니다. 거기에 맞춰 정신적으로 남자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신사임당 이미지를 거기에 맞춰 만들어서 이용하게 됩니다.

 

신사임당의 업적인 예술가 어머니 교육자로써의 이미지가 그렇게 일제 강점기에 군국의 어머니로 악용되고요 일제 강점기가 끝난 후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현모양처의 어머니 이미지로 굳혀지게 됩니다.

 

신사임당은 4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요. 그중에 3명이 역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장녀 매창은 화가로써 이름을 날리고 막내아들인 이우도 화가로써 이름을 남깁니다. 다른 아들인 율곡이이는 9번 장원급제를 하며 학자로써 이름을 날립니다.

 

이상 신사임당 업적과 생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신사임당은 마냥 현모양처가 아니라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도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은 능렸있고 독립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런 신사임당을 본받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교훈을 주신 신사임당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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