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 망소이의 난에 대해 알아봅시다

망이 망소이의 난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고려의 무신정권시대에 일어난 난인데요 무신시대 100년간 1170~1270년까지 75건의 민란이 일어나 민란의 시기라고 불리는 시절에 일어난 난입니다. 정중부 시절 일어났고 최충헌이 정권이 잡고 있을 때 진압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민란이 시대 때 난이 일어난 지역들()과 망이 망소이의 난 기념탑(아래)입니다.

당시 노비들은 비참하게 살았는데요. ‘1판값 = 노비 2~3명값일 정도로 노비들은 사람대접을 못 받으며 살던 시기입니다. 그 와중에 이의민이 천민 출신에서 고려 넘버 1되는 것을 본 노비나 농민들이 난을 굉장히 많이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1176년 정월(정중부 집권시절)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납니다. 당연히 주동자는 망이와 망소이인데요 기록에는 이 둘이 형제라는 사항은 적혀있지 않지만 이름이 비슷하고 같은 지역에 살며 같이 망이 망소이의 난을 일으킨 근거로 형제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망이와 망소이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공주를 공격해 함락시킵니다. 위기를 느낀 조정은 군사 3천명을 보내 토벌하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위의 그림은 고려지방제도의 서열을 보여주는 그림()과 소에 사는 백성들이 세금+수공업제품을 내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아래)입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고려의 지방제도를 살펴봐야 하는데요. 당시 고려의 지방제도는 3단계로 되어있습니다. 맨 위가 주현으로 지방관이 파견하는 곳입니다 그 바로 밑이 속현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근처 지방관이 보조로 살피는 지역입니다. 제일 밑에 향, , 부곡이란 지역이 있는데 그 지역 주민들은 국사책에 얼마 전까지 노예들이 살던 지역이라고 말할 정도로 천대를 받는 사람이 살던 지역입니다. . , 부곡 사람들(=잡척)은 양민이긴 하지만 굉장히 천대를 많이 받았고 세금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이 내고 국유지에서 일하는 등 노동도 더 많이 했습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 처음에 일어난 지역인 명학소가 바로 소라는 지역이라 천대를 받으며 힘들게 살던 지역에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명학소 지역은 현재 대전광역시 탄광동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려 조정은 당시 다른 곳에서도 난(조의총이 난)이 나 망이 망소이의 난을 진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학소를 충순현(주현)으로 승격시켜 줬는데요. 그래서 망이 망소이의 난은 소강상태가 되고 망이와 망소이가 1177년 개경으로 가 항복을 하는데요. 이때 고려 조정은 몰래 사람들을 보내 망이와 망소이의 가족들을 잡아갑니다.

 

이 사실을 안 망이와 망소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려사 세가 명종 7싸우다가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까지 쳐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끈 고려 조정은 군사를 동원 할 수 있게 되어 토벌대를 공주에 보내 망이 망소이의 난 세력의 진압을 성공합니다. 그리고 명학소는 다시 소로 하락합니다. 이 후에 민란의 시대답게 전국적으로 민란이 계속 발생합니다.

 

그 후 고려시대는 향, , 부곡이 900개였지만 조선 초는 100개가 되며 점차 소멸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우리는 위의 사항을 상식으로 아는데요. 저런 평등사상은 망이 망소이같은 분들이 평등을 위해 희생한 것들이 쌓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짧게 보면 망이 망소이의 난은 실패 한 것이지만 긴 역사적 관점에서는 승리한 민란입니다.

 

이상 망이 망소이의 난에 대한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을 일으켜 희생하신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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