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에 대해 알아봅시다

홍범도 장군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홍범도 장군 는 독립운동가 십니다. 무장투쟁을 하였는데요. 대표적인 사건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 것입니다. 그 외에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셔서 승리하는데 한몫 단단히 하신 분이십니다. 홍범도 장군 은 러시아에 끝까지 남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서는 관심이 별로 없는 분인데요 여기서는 홍범도 장군 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홍범도 장군 사진(위 사진)과, 흉상입니다.

홍범도 장군 이 승리로 이끈 봉오동 전투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3.1운동은 1919년 일어나고 봉오동 전투는 1920년 일어나는데요 3.1 운동 후 일어난 애국 열을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며 다시 한번 애국 열을 상승시킨데 의미가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 부대의 특징은 다른 독립군 부대들 보다 더 유달리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소규모 유격전을 한 것입니다. 국내 진공작전이란 건데요. 일본군 부대를 조선땅에서 유격전으로 피해가 가게 많이 한 것이 특징입니다.

 

홍범도 장군 부대는 대한독립군이었는데요. 1919년 홍범도 장군 이 대한국민회의 후원을 받아 창설한 항일 독립군 부대로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달리 활발한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 부대는 약 300명이었고요.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은 2만여명이었습니다. 300명으로 2만여 명을 물리칠 수는 없지요. 당시 일본군은 동아시아 최강 군이기까지 했습니다.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이유는 정치적 파국 효과 때문입니다. 홍범도 장군 별명이 ‘날으는 홍범도’라고 붙여졌다고 합니다. 일본군도 그렇게 불렀답니다.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이었고요. 독립군 전사자는 4명이었습니다. 비정규군인 대한독립군이 정규군 일본군을 크게 이긴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 은 머슴 출신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이 태어날 때 어머니는 홍범도 장군을 낳고 7일 만에 돌아가시고요. 홍범도 장군 아버지도 홍범도 장군을 키우다가 홍범도 장군 9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 은 이웃집에 있는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사시는데요. 당연한 거겠지만 머슴으로 일하시면서 천대도 많이 받고 고생도 많이 하시는데요. 그래서 돌파구로 찾은 것이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군대에 입대하려면 17살은 돼야 했습니다. 근데 홍범도 장군은 15살 때 나이를 속여서 나팔수로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 후 군대에서 상관과의 마찰 등 군대 생활도 어려워져 제대 해 금강산에 승려로 들어가십니다. 불심이 깊었다기보다는 현실을 피해보고자 승려로 들어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1년 반 정도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도생활을 하십니다. 승려를 하면서 거기서 한글을 배우시고요. 역사를 배우시면서 역사의식을 갖게 되십니다.

 

또 반려자도 승려생활을 하시면서 만나십니다. 아내분이 비구니 셨는데요. 말이 잘 통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은 절에서 나오시고 포수를 하십니다. 포수를 하시면서 명사수로 소문이 나셨습니다. 함경도 북청에서 포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포계라고 산포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조직이 있는데요. 거기서 리더를 하시면서 산포수 들을 이끄는 리더십을 보이셨습니다.

 

산포수는 평소에 총으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전투를 잘할 수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일제 치하 시절에 우리나라 최고의 부대는 포수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을 정도로 포수는 평소에 총을 다루는 직업이라 전투력이 엄청 높았습니다. 거기서 홍범도 장군 이 리더를 하신 것입니다.

 

근데 일본이 총포 및 화약 단속법을 펼치면서 민간인이 총을 못 가지게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범도 장군 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무장항쟁을 하십니다. 물론 홍범도 장군 은 1895년 이후부터 꾸준히 의병활동을 하고 계셨는데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신 게 일본의 총포 및 화약 단속법 시행 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 찬양가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홍범도 장군 찬양가 가사는 아래입니다. 곡은 안 전하고 가사만 전하고 있습니다.

“1절: 홍 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4절: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왜적 수사대에 열한 놈 몰살시켰소 “

 

 

홍범도 장군 명성이 너무 자자하니까 일제는 홍범도 장군 가족을 모두 감옥에 넣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부인이신 이옥녀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시다가 돌아가시고. 아들이 2명이 있었는데 큰아들인 양순은 독립운동하면서 전투(바배기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십니다. 작은 아들 용환은 결핵으로 돌아가십니다.

 

홍범도 장군 은 아내와 큰아들을 잃고 연해주로 망명을 가십니다.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시고, 금광에서도 일하시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십니다. 또 다른 분들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도 기부받으십니다. 그래서 당시 돈으로 3,050원 정도를 모으시는데요. 그 돈으로 체코제 소총 17자루와 실탄 1,700개를 구입하십니다.

 

이런 홍범도 장군 의 행동은 단독적인 행동은 아니고요. 권업회라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크 신한촌에서 조직된 항일운동 단체와 연결되는 행동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부대는 대한북로독군부 였고요. 김좌진 장군 부대는 북로군정서였습니다. 1920년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에 둘러싸여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데요 그래서 홍범도 장군 부대가 청산리로 가서 김좌진 장군 부대를 돕습니다. 처음엔 따로 전투를 벌이다가 나중엔 연합해서 함께 전투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청산리 전투는 김좌인 장군 부대 + 홍범도 장군 부대 의 연합체에 의해 승리합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청산리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일본군 전사자 1,200여 명, 일본군 부상자 200여 명.

 

대한독립군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일제는 조선 민간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 부대는 1921년 안전한 퇴각을 위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는데요. 당시 1차 세계대전이었어서 러시아와 일본이 같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일본의 요구대로 홍범도 장군 부대를 러시아 자유시에서 무장 해제시키고 사살도 시켰습니다.

 

홍범도 장군 은 러시아 자유시에서 머물며 독립운동을 계속 모색하셨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강제이주가 1937년 일어나 자유시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십니다. 러시아가 자유시에 있던 한인들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킨 이유는 한인들이 일본인들의 스파이가 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입니다.

 

홍범도 장군 은 카자흐스탄에서 고려극장 수위로 근무하시다가 삶을 마치셨습니다.

 

홍범도 장군 이 고려극장 수위로 일하시는데요 고려극장에서 연출을 맡은 태장춘이라는 분이 홍범도 장군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생각나는 대로 홍범도 장군 생애에 대해 기록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 이 자신 생애를 기록한 것을 토대로 연극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공연되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 은 1943년 생을 마치십니다.

 

이상 홍범도 장군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빠른 시일 내에 꼭 봐야겠습니다. 조국을 위해 일생을 헌신해주신 홍범도 장군 님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듯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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