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 실제 과정에 대해 알아봅시다

하멜 표류기 실제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네덜란드인 하멜 은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는데요. 1653년 여름에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일본과 교역을 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가다 심한 파도에 배가 부서지고, 표류하다 조선 제주도 땅을 밟습니다. 하멜은 배가 부서져 총 인원 36명이 함께 제주도에 오게 됩니다.

 

 

위의 사진은 여수에 있는 하멜 전시관(위 사진)과 하멜 동상(아래 사진)입니다.

이때 어떤 조선사람이 이들을 목격하고 도망가 조선 정부에 알리고요. 조선 정부는 군인 1,000여 명을 동원해 다음 달 하멜 표류기 인원들을 포위합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하멜 표류기 인원들을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하멜 표류기 를 쓴 하멜은 당시 23세이고 국적은 네덜란드입니다. 직업은 서기로 보통 선원들보다 더 교육을 받은 인물로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선 체류기간은 총 13년 28일인데요 1653년(효종 4년) ~ 1666년(현종 7년)까지 있었습니다. 13년동안 조선 정부의 관리하에 있다가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가 동인도회사에 월급을 받을 목적으로 하멜 표류기 를 쓴 것입니다.

 

하멜 표류기 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유럽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고는 있었습니다.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고요. Corea라는 나라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붙어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였습니다.

 

아래는 –하멜표류기 中-입니다.

“그 사람들은 중국식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엔 말총으로 짠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해적이나 본토에서 추방된 중국인들이 사는 곳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모두 겁을 먹었습니다.”

 

아래는 하멜 인원들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이들을 관리한 제주목사 이원진이 조정에 보낸 보고서입니다. -효종 4년 8월 6일-

“이 사람들은 눈이 파랗고, 코가 높고, 머리가 노랗고, 수염이 짧습니다.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여인들이나 입는 알록달록한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것이 우리와는 풍습이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하멜 인원들은 광해군이 유배 생활하던 집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라는 인물이 조선 이름 박연으로 귀하 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1627년(인조 5년)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최초의 서양인인데요. 조선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네덜란드어를 까먹어서 처음에 하멜 표류기 인원들을 만났을 때 소통이 안되어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네덜란드어로 계속 얘기를 하다 보니까 얀 얀스 벨테브레가 네덜란드어를 조금씩 생각나는 눈치였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통역을 중간에서 했습니다.

 

하멜 인원들의 19명 신상기록이 전해지는데요. 그들은 서기, 일등항해사, 조타수, 포수, 급사, 하급 수부장 등 여러 직업들을 골고루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멜 인원들이 가지고 온 물품은 대포, 중포, 소포, 조총 등의 무기류와, 은 600냥, 모래시계, 망원경, 거울 등이었습니다.

 

제주도 정부에서 처음엔 하멜 인원들에게 식량을 대주다가 나중엔 부식을 제공 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밥하고 바닷물 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기상이변 현상 등이 나타나 흉작이 많이 나 조선 보통 백성들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하멜 표류기 인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먹을 것 얻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하멜 표류기 인원들은 제주도에 있으면서 탈출도 시도하는데요. 붙잡혀서 곤장 25대를 맞았다고 합니다.

 

당시 효종은 청나라의 경계 속에서 몰래 북벌을 추진하던 상황이었는데요. 이럴 때 하멜 표류기 인원들 때문에 잘못하면 청이나 일본과 외교문제가 비화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어쩔 줄 몰라 일단 억류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멜 인원들은 제주도에 있다가 한양으로 압송되어 효종을 알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효종은 당시 북벌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에 도움이 될까 해서 하멜 표류기 인원들을 잘 대해주고 직업도 줍니다. 하멜은 조총과 화약 등을 지급받기도 했습니다.

 

하멜 인원들이 공연 같은 것도 잘하니까 조정에서 공연도 하고 권문세가 같은데 불려 가서 공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생활은 힘들었는데요. 당시 중국인들이 사는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5km 정도를 걸어가서 나무를 해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하멜 표류기 인원 2명이 청나라 사신들 중국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뛰어들어서 자기들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도 데려가지는 않았는데요. 조선에서는 외교적으로 심각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한 2명은 몰래 죽였다고 합니다. 그 후 나머지 하멜 표류기 일행들도 외교적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만한 전라 병영으로 이동되어 고된 잡역에 동원됩니다. 원래 강경파들은 하멜 인원들을 다 죽이자고 했는데요. 효종이 선처를 해서 살려주고 전라도로 보낸 것입니다.

 

-하멜 표류기 내용 中-

“우리는 밥과 함께 먹는 소금 한 줌을 구하려고 3km 이상을 걸어야 했다.”

전라 병영에서는 그나마 처음엔 다 같이 있으면서 먹을 것을 줬는데요. 조선이 당시 힘들 때라 그나마도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여수 12명, 순천 5명, 남원 5명으로 찢어져서 하멜 표류기 인원들을 보내 관리를 하고 먹을 것을 줬습니다.

 

1666년 9월 5일 당시까지 생존한 하멜 표류기 인원은 16명이었는데요. 여수 해안에서 하멜 표류기 인원 8명이 배를 훔쳐 달아나는 데 성공합니다.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 만입니다.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갑니다. 그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런 네델란드 배를 타고 하멜 표류기 인원들은 네덜란드로 귀국합니다.

 

이후 하멜 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13년 동안 논게 아니라 업무 보다가 조선에서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어 월급을 받기 위해 하멜 표류기를 집필합니다.

 

이상 하멜 표류기 실제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조선은 저런 서양인들을 잘 구슬려서 그들의 선진문물을 배우는데 활용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런 모자람이 쌓여 결국 일본에 먹히는 결과까지 간 것이라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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