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895년 10월 8일(고종 32년) 신호탄이 울리자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합니다. 작전명은 여우사냥이고, 표적은 명성황후였습니다. 왕비의 처소가 있는 건청궁까지 일본 자객들이 침투하는데요. 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도 합니다. 위의 지도는 당시 경복궁 지도인데요. 사건 당일 일본군대는 광화문 쪽에도 있었고, 춘생문, 추성문에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경복궁을 일본군대가 에워싼 상황입니다. 사건 당일 새벽 5시 정도에 신호탄이 발발하고요. 그것을 신호로 위에 보이시는 선처럼 사방에서 일본군과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에 침투합니다. 당시 ..
명성황후 실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사람은 공이 있고 과가 있습니다. 살면서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는데요. 여기서는 기록상에 나와 있는 내용을 통해 명성황후의 공과 과를 알아보며 명성황후 실체 를 살펴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초상화는 명성황후 초상화지만 맞는 것은 아니고 현대에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위)입니다. 아래 사진도 명성황후 사진으로 퍼졌지만 역사학자님은 명성황후 사진이 아니라고 하십니다.명성황후는 16세에 고종과 결혼하는데요. 그렇게 명성황후가 되는 데는 흥선대원군의 조력이 큰 작용을 했습니다. 당시는 세도정치가 득세하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세도정치를 타파하는 시기인데요. 이 시기에 왕비를 잘못 앉히며 다시 세도정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자기 처..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는포스팅을 하겠습니다.흔히 동학농민운동으로 알고 계시는데요.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정식 명칭은동학농민혁명으로 정해졌습니다.당시 얼마나 원통했으면 그런 난리가 일어났고그 전개과정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곳은 1894년 당시 고부라는지역입니다. 현재의 정읍정도 되는 곳인데요. 전라도지역은 곡창지역이라서 농산물이 풍부한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이 뽑아 먹을 것이많았는데요 그러니 관리들에 의한 수탈이 많았던지역입니다. 당연히 불만이 쌓여 있었겠죠. 당시 탐관오리의 대명사는 조명갑이라는 사람입니다.백성들에게 거짓말을 계속하면서 세금을 계속 걷었고요 불효죄, 잡기죄, 친척들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