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해 봅시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흔히 동학농민운동으로 알고 계시는데요.

20043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 명예 회복

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정식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정해졌습니다.

당시 얼마나 원통했으면 그런 난리가 일어났고

그 전개과정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곳은 1894년 당시 고부라는

지역입니다. 현재의 정읍정도 되는 곳인데요.



전라도지역은 곡창지역이라서 농산물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이 뽑아 먹을 것이

많았는데요 그러니 관리들에 의한 수탈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당연히 불만이 쌓여 있었겠죠.

 


당시 탐관오리의 대명사는 조명갑이라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에게 거짓말을 계속하면서 세금을 계속 걷었

고요 불효죄, 잡기죄, 친척들과 사이가 안 좋은 죄등

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탈취하기 위한 세금을 걷었는데요.

현재돈 4억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수탈에 대해 내용을 정리하여 그러지

말라고 항의 서안을 만들어 전봉준 아버지인 전창혁

이 서안을 관아에 제출했지만 조병갑 군수에게 고초를

당했다고 합니다. 조병갑 군수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1894년 갑오년에 전봉준은

상복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깃발들도 보이는데요. 깃발들을 살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기본 생각들을 알 수 있습니다.

깃발에 있는 글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광제창생(廣濟蒼生)등이었습니다.

뜻은 보국안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

제폭구민: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

광제창생: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

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구호하고 비슷하네요.

 


위에 초상화는 전봉준 얼굴인데요.

별명이 녹두장군인 이유는 어렸을 때 별명이

녹두 였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체격이 왜소해서 녹두란 별명이 붙었지만

눈매는 살아있습니다.

 


저것은 사발통문이라고 고부 농민 봉기의

주요 참가자이름과 지향하는 바를 적은 격문인데요.

주요 참가자 이름을 가운데 사발을 놓고 원형으로

적었습니다.

저렇게 적은 이유는 원탁회의처럼 누가 실질적

리더인디 모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격문 간단 내용은 아래입니다.

났네 났네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겠는가?“

농민들 목표 1. 고부 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농민들 목표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탐관오리 징벌

농민들 목표 3. 전주성을 격파하고

서울로 직행할 것

그래서 서울의 권귀(민 씨 정권)을 제거할 것

입니다.

당시는 명성왕후에 빌붙어서 수많은 민 씨들이

탐관오리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농민들에게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협상하여 해산시킨 다음 주모자를 찾아 죽이는 등

농민들을 처벌했습니다.

 


농민들은 이에 분개해 전봉준이 손화중 김개남등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들이 봉기하게 됩니다.

만여 명의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첫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흥덕 무장 등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1894427

조선왕조의 본관 전주성을 점령합니다.

 


당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농민 분들이 산에 워낙 많이 모여서 그 분들이 서

계시면, 당시 농민 분들은 흰색 옷을 입으셨기 때문에

서면 백산이라고 했고요 또 당시 대부분 죽창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농민들이 앉으면 죽창들이 서있는게 많이

보여서 않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농민 분들이 많이 모이셨습니다.

 


그 후 정부와 동학농민군은 다시 협약을 맺게

됩니다. 전주화약이라고 하는데요. 18945

7일 맺게 됩니다.

그 협약으로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합의 하고요

12개조 폐정개혁안에 합의를 합니다.

그 후 농민군은 자진 해산을 합니다.

12개조 폐정 개혁안 내용은 아래입니다.

1. 탐관오리 엄징

2. 노비문서 소각

3. 청춘과부 개가 허락

4. 무명잡세 폐지

5. 토지 평균 분작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의 평량갓 없애기

7. 동학도는 정부와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8.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9.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10.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1.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2.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집강소의 활동 내용은

1. 노비해방

2. 토지 소작권을 평등하게 나눔(소유권 아님)

3. 억울한 피해를 입은 농민들 구제

입니다.

위의 사항들은 집강소 힘이 강한 지역은 잘 지켜

졌지만 집강소가 없거나 힘이 약한 지역은 잘

안지켜졌다고 합니다.

 


동학농민군의 주장인 노비제 폐지, 재정 개혁,

과부 개가 허용 등은 갑오개혁에도 반영 되게

됩니다.

 


동학농민군의 힘이 너무 강해지자 조정은 청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189455일에 청군이

아산만에 도착하는데요.

일본이 이를 알고 자기들도 일본군을 조선에

투입하고요

1894621일 새벽에 일본군이 경복궁에

기습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왕실을 인질로 잡게 됩니다.

그 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청을 물리칩니다.

 


그 소식이 전해진 후 동학농민군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다시 2차 봉기가 일어납니다. 당시 구호는

척양척왜(斥洋斥倭) 서양과 일본 세력을

몰아내자입니다.

 


당시 우금치 전투에서 농학농민군은 일본과

싸우게 되는데요. 일본군은 당시 화승총도 아니고

현대식 소총을 가지고 있었고요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죽창에다가

화승총 조금 가지고 있었으니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양민학살이죠 산과들이 동학농민군의 시체로 뒤덮였

다고 합니다.

전투는 사기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전투력도 중요합니다.

죽창 들고 천명이 달려들어도 기관총 2~3개만 있으면

다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과의 싸움에서

밀린 적은 있어도 진적은 없다고 합니다.

완전한 일본군의 승리였습니다.

일본군인 1명이 2~3백 명의 적을 상대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군과의 전쟁에서 일본 후비보병19대대는

1명밖에 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은 저렇게 3개부대로 나누어 동학농민군을

코너로 몰며 다 죽였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조선에서 가장 위협적인

상대로 보고 있었으며 그래서 다 죽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냥 총으로 죽인 게 아니라 가능한 잔인하게

많이 죽였는데요.

일본군 장교가 자살할 정도로 잔인하게 대량 학살을

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이고요 구체적 작전 명령은 가와카미

소로쿠가 했습니다.

 


당시 양반들은 일본 편이었습니다.

민보군이나 보부상을 이용해 정보 같은 것을

일본에 넘기고 토벌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전봉준이 잡혀서 끌려가는 사진인데요.

당시 다리가 뿌려져서 저렇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 후손들은 역적이란 죄가

씌워져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족보를

바꾸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포스팅 초기에 말했던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명갑은 고등법원 판사가 되어 1898

동학 2대교주인 최시형의 사형을 판결합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제목: 서울로 가는 전봉준-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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