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 에 대해 알아봅시다

진주대첩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진주대첩은 진주성 전투를 뜻합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이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 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입니다. 진주성 전투는 1차(1592년)와 2차(1593년)로 2번 하는데요. 진주대첩은 진주성 1차 전투를 뜻합니다. 이유는 진주성 1차 전투 때는 김시민 장군의 지휘로 크게 승리했지만, 2차 때는 조선이 몰살당했기 때문입니다.

 

 

1592년 4월(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진주성은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성 맞습니다. 일본은 진주성을 ‘모쿠소성’이라고 하는데요. 위의 지도에서 빨간색은 조선 행정구역에서 ‘목’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저 행정구역 목 중에 진주성도 포함된 것입니다. 진주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행정구역 목의 최고 책임자는 목사(牧使)라고 불렀는데요. 목사라는 발음을 일본사람들이 발음하기에는 모쿠소라고 읽혔습니다. 근데 일본에서는 진주성 전투의 패배가 너무 커서 모쿠소라고 하면 진주목사 김시민을 뜻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시민 장군이 많이 안 알려졌지만 일본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 가부키 공연 ‘덴지쿠 도쿠베 이국 이야기’에서는 김시민 장군의 아들인 주인공 덴지쿠 도쿠베가 인도에서 기독교 주술을 배워 일본의 전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김시민 장군은 일본에 유명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김시민 장군의 이력서인데요. 김시민 장군의 시호도 충무공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시호입니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김시민 장군이 처음엔 관군을 이끌며 의병들과 함께 왜병들을 격퇴하는데요. 원래 진주목사였던 이경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산으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김시민 장군이 한 것입니다. 진주대첩이 일어나기 2달 전에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가 된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진주대첩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스펙차이입니다. 조선군은 1대 6 정도로 전투를 벌인 것입니다. 그것도 정규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군+백성이었습니다. 또 젊은 남자만 전투했던 것이 아니라 여자들까지 모두 최전선에서 같이 싸웠습니다. 전투할 때 여자들이 앞에서 보이면 일본군에게 너무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 여자들도 다 남장을 하게 해서 남자들만 싸우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위장술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군의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간폭탄으로 대포 형태로 적진에 날라가 조금 있다가 거기서 터지는 형태의 무기였습니다. 진주성 근처에서 실제로 비격진천뢰의 파편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래의 그림이 진주성의 지형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진주성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있고, 서쪽의 노란색은 다 절벽입니다. 또 북쪽은 해자(성곽을 둘러싼 호수)로 되어 있어서 동쪽만 잘 지키면 됐습니다. 저런 천혜의 방어 지형을 가지고 있어 진주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진주대첩 당시 조선도 힘들지만, 일본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조선에서 피리를 불게 해 슬픈 음악을 듣고 왜병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심리전도 펼쳤습니다. 그러다 꽹과리 같은 것도 가끔 크게 쳐 공포감도 유발했습니다.

 

진주대첩 당시 유숭인이라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진주성에 들어가려고 했는데요. 김시민 장군보다 상관입니다. 그러면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의 지휘체계가 흔들릴 수 있어 진주성 문을 안 열어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숭인은 진주성 밖에서 전투를 벌이다 죽는데요. 김시민 장군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며 진주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지켰습니다.

 

 

위의 그림은 진주대첩 당시 지원한 의병들입니다. 모두 3천 명 정도 됩니다. 저런 의병들은 진주성 밖에서 게릴라전으로 왜병을 공격하여 왜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진주대첩이 중요한 이유진주성을 점령해야 왜가 전라도 지역을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전라도는 곡창지대인데다가 이순신 장군도 활동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조선의 식량도 공급할 수 있었고,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도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당시 경상도 쪽에서 의병들이 활동을 많이 했는데요. 경상도 쪽에 있는 의병들을 소탕하려면 진주성을 점령해야 했습니다.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경상도에서 의병들이 맹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 정복에 실패하고, 의병들 활동이 많으니까 왜의 보급이 어려웠습니다. 왜군에 제공할 식량, 무기, 군수물자, 인력 등을 계속 보내야 하는데 후방이 안전하지 못하니까 왜가 평양 이북으로는 더 이상 못 올라가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때 위의 그림처럼 일본군 2만~3만이 덤비지만, 그 중 1만여 명이 사상당합니다. 조선군은 3,800여 명 수준이었습니다. 일본군이 후퇴할 때 너무 많이 죽어서 감추려고 왜군 시체들을 태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진주대첩은 6일간 계속 진행하는데요. 김시민 장군은 마지막 날 왜군의 총탄에 막고 돌아가십니다. 하지만 진주성은 지켜냅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참여하고 전투도 벌이다가 명과 왜가 전쟁 협상을 하는데요. 일본의 요구 중 하나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일부 지역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는 자신의 이런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진주성을 다시 한번 공격하기로 합니다.

 

또 왜에게 큰 피해를 준 진주성을 본보기로 삼으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이 이기고 일본은 진주성에 있던 사람을 포함해 가축까지 모두 죽였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조선군은 1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고요. 일본군은 10만 ~ 12만 정도였습니다. 그냥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당시 일본 최 정예병들을 모아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이 낮에는 3번, 밤에는 4번 공격을 했다고 합니다. 왜는 군사가 많으니까 돌아가면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는데요. 조선은 밤에 잠도 못 자면서 계속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또 일본은 2차전 때는 진주성 북쪽의 해자를 흙으로 다 메꾸고 전투를 벌입니다. 그사이 신무기도 개발해 진주성 성벽도 화약으로 폭파하고요. 당시 장마여서 물에 진주성 벽이 헐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든 악조건으로 2차 진주성 전투는 패배합니다.

 

2차 진주성 전투 전에 이미 조선은 2차 진주성 전투가 패배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 최정예군 10만 ~ 12만이 덤비는데 어떻게 막겠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공성파와 수성파로 나뉘는데요. 공성파는 희생을 피하기 위해 성을 비워야 한다는 집단이고, 수성파는 내 땅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는 집단입니다.

 

실제로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많은 관군이 진주성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갑니다. 의병들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진주성 전투에서 빠지기도 하는데요.

 

마지막까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싸웠던 수성파로 내가 죽고, 질 것은 알지만 끝까지 싸우신 분들입니다. 질 것은 알지만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싸웠던 대표적인 분을 삼충(三忠)이라고 하는데요. 삼충은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충청도 병마사 황진입니다. 김천일과 최경회는 의병장 출신입니다. 또 이름 없는 다른 백성들도 질 것은 알지만 끝까지 싸우셨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는 했지만, 끝까지 싸워주신 백성들이 계셔서 전라도 지역은 지키는 효과를 보았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었을 때 많은 조선 백성들이 왜에 죽느니 자결하겠다면서 남강에 많이 빠져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의병의 날은 매년 6월 1일로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제정한 법정기념일입니다.

 

이상 진주대첩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한민족도 나라가 없어질 위기가 많았는데요. 한민족의 위기일 때 그 빛을 발휘했던 것은 의병들 같은 일반 백성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조상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반응형
그리드형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