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서양화가 독립운동가 작가에 대해 알아봅시다


나혜석 서양화가 독립운동가 작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수원에는 나혜석 작가를 기리기 위해 나혜석 거리가 있더라고요. 나혜석은 1896년생 수원 출신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해서 서양화가이기도 했고요. 시나 소설 에세이 등을 써 작가로도 활동했습니다. 또 김마리아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해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의열단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시기도 했습니다.

 

 

위의 사진 왼쪽 여자분이 나혜석이고요. 오른쪽 남자가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입니다. 나혜석 일대기는 옛날에 영화 ‘화조’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화조의 줄거리는 근대 개화기의 대표적인 신여성 나혜석이 바람피우다 이혼당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대기를 담았습니다.

 

 

나혜석 하면 최상위층의 생을 살았지만 타락하고 스캔들 나서 결국 몰락하고 만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에서 말한 대로 독립운동도 하고, 그녀의 불행은 그녀가 타락해서가 아니라 당시 남자는 되면서, 여자는 안되는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사고방식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륜인데요.

 

일제 강점기 당시 불륜은 대한민국 시대 불륜과는 다르게 여자에게만 적용되고 남자에게는 적용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부남들은 첩도 두고, 사창가도 가면서 불륜은 적용 안 하고요. 여자들만 불륜을 적용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나혜석이 이혼을 당하고 이런 사실을 주장했지만, 사람들에게 많은 악플을 받아 수전증(손 떨림 현상)이 생겨 화가가 그림을 못 그리는 사태가 난 것입니다.

 

나혜석은 한국인 여성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하신 분입니다. 그만큼 본인이 똑똑하기도 하고, 친정 집안도 잘살았습니다. 당시 여자 유학생들은 대부분 자수, 조화, 수예 등을 전공했는데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나혜석이 간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나혜석의 일본 유학 시절 신문에 나온 사진입니다. 히사시가미라는 저 머리는 당시 많은 여자가 하던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었습니다.

일본 유학생일 때 나혜석은 신문에도 보도되었는데요. 내용은 조선 여자이면서 공부가 일본 여자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7년 후에(1921년) 동아일보에도 보도가 되는데요. 서양화가 나혜석 여사가 개인 전람회를 개최한다는 뉴스입니다. 여자로서 전람회는 조선 처음이라고 합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조선 최초의 여류화가는 나혜석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당시 관람객이 이틀 동안 5천 명 넘게 오고요. 유화 70여 점 가운데 20여 점이 판매됩니다. 제일 비싸게 팔린 작품은 ‘신춘’이라는 작품인데요. 이게 350원(현재가치 3,500만 원 정도)에 팔렸습니다.

 

나혜석은 조선미술대전에 1회(1922년)부터 11회(1932년)까지 총 18점의 작품을 발표합니다. 나혜석의 유화는 40여 점이 전해지고 있으나 출처와 소장 경로가 확실치 않아 진위논란이 많습니다.

 

 

위의 그림이 나혜석 작품 중 진짜라고 인증받은 그림들입니다. 나혜석 작품의 특징은 견고한 구성, 치밀한 묘사, 활달한 붓질입니다.

 

나혜석 친정 집안은 수원에서 ‘나 참판 댁’으로 유명해서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 후기부터 11대째 내려오는 ‘나 부자 집’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인 나기정(1863~1915)은 시흥 군수와 용인 군수를 지낸 개명 관료입니다. 집안에 돈이 많으며 자식들 교육에도 투자를 많이 해서 나혜석 4남매는 모두 일본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기정도 결국 당시 사람이었습니다. 여자는 시집 잘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서 딸에 대한 교육도 딸이 직업을 잘 선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집 잘 가기 위한 스펙정도로 아신듯합니다. 이것 관련 나혜석이 쓴 ‘경희’라는 소설에서 이야기하는데요. 참고로 나혜석이 쓴 소설, 시나리오, 수필, 시가 약 150여 편입니다. 아래는 관련 글입니다.

 

경희 아버지: 계집애는 시집가서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다.

경희: 그건 옛날 말입니다. 계집애도 사내와 같이 돈도 벌고 벼슬도 할 수 있어요.

경희 아버지: 시집가면 좋은 옷에 배불리 먹다 죽지 않겠니?

경희: 남편이 벌어다 준 밥을 그대로 얻어먹고 사는 것은 우리 집 개와 다를 바 없지요.

 

이것이 당시 나혜석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요.

 

 

위의 사진은 김우영과 나혜석 결혼사진입니다.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은 변호사입니다. 6년이나 나혜석을 쫓아다녀 결혼에 성공한 것입니다. 당시 나혜석은 25살인데 당시로써는 굉장한 노처녀입니다. 김우영은 나이가 10살 연상이었습니다. 김우영은 전처를 사별하고 혼자 전처와의 사이에서 나온 딸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나혜석이 김우영을 허락하며 내민 결혼 조건 3가지는 아래입니다.

O 지금과 같이 나를 평생 사랑할 것.

O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O 시어머니와 전처의 딸과는 따로 살 것.

입니다. 김우영은 모두 수용하고 결혼 승낙을 받습니다.

 

 

위의 사진은 시인 최승구입니다.

그리고 김우영과 신혼여행을 전라남도 고흥으로 갑니다. 고흥은 나혜석 첫사랑인 시인 최승구가 죽어 묻힌 곳입니다. 김우영은 최승구의 묘비까지 세워줬다고 합니다. 참고로 나혜석 호가 정월(晶月)인데요. 최승구 호가 소월(素月)입니다.

 

 

남편 김우영은 변호사로 활동을 하다 1921년 9월부터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을 합니다. 외교관인데요. 나혜석은 일본 정부 외교관의 아내 지위로 독립군들을 몰래 지원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혜석은 김마리아 선생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간 투옥 생활을 하십니다. 그 후 만주에 있으면서 남편의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독립운동에 협조합니다.

 

황옥 경부 폭탄 사건(1923년)이라고 영화 밀정의 모티프가 된 사건이 있는데요.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 씨가 맡았던 역할이 황옥인데요. 황옥이라는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이 의열단 단원들과 협력해 국내로 폭탄 밀반입 시도에 관여한 사건입니다. 폭탄을 만주에서 한반도로 밀반입할 때 나혜석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의열단 단원 유석현이 체포 직전 나혜석에게 권총 2자루를 맡겼다고 합니다. 그 후 나혜석은 그 권총을 베개 밑에 숨기고요. 유석현이 경찰에게 풀려난 후 나혜석에게 찾아가 그 권총 2자루를 돌려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편 김우영은 부인이 독립군들을 돕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모른척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이 나혜석과 4자녀입니다. 김우영과 나혜석 사이에서 자녀 4명을 낳았습니다. 부부 금실도 좋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27년 나혜석은 부산을 시작으로 세계 일주를 합니다. 한국 여성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것입니다. 21개월간의 대장정인데요. 파리에서 사건이 터집니다.

 

 

위의 사진은 최린 모습입니다.

1928년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는데요. 남편 김우영은 일이 있어 독일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김우영과 친분이 있던 최린에게 아내를 부탁하는데요. 최린은 천도교의 유력자이고,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입니다. 당시 최린은 천도교 대표로 유럽 시찰 중이라 파리에 있던 상황입니다. 최린은 나혜석보다 18살이나 많은 유부남이었습니다. 이 최린과 나혜석이 불륜을 저지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남편 김우영도 알게 됩니다. 나혜석은 아이들도 4명이나 돼서 이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남편에게 무릎 꿇고 빌면서 현모양처로만 살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김우영은 이혼합니다. (1931년 이혼)

 

당시 이혼 전에 김우영은 다른 여자와 서울에 살림까지 차린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남편인 김우영은 되지만, 아내인 나혜석은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이혼한 후 1934년 8월 ‘이혼 고백장’이라는 결혼과 이혼 과정을 당당하게 고백한 글을 발표합니다. 관련 글은 아래입니다.

 

“조선 남성들은 참 이상하오. 자기들은 몇 집 살림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소. 하지만 여자도 사람입니다.”

 

이혼 고백장의 파급력은 엄청났습니다. 경성 전체가 발칵 뒤집어 졌는데요. 그래서 요즘으로 치면 악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 것이 너무 힘들어 나혜석은 손이 떨리는 수전증을 앓게 되어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게 됩니다. 불행이 겹친 것이 그때 그려놓은 그림들이 있던 창고도 화재가 나 많은 그림이 소실되기도 합니다.

 

그 후 나혜석은 최린에게 위자료 12,000원(현재가치 15억 정도)을 청구합니다. 결국, 합의를 하는데요. 합의 조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나혜석은 불륜으로 이혼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주홍글씨가 새겨져 사회적 활동이 마비됩니다. 그림을 그려도 사람들이 안 사가고, 글을 써도 사람들이 책을 안 사갑니다. 그림을 가르치려고 해도 사람들이 안 찾아오는 등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게 됩니다. 이때 일본이 친일파 되면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하지만 나혜석이 거부합니다.

 

최린은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사회적으로 승승장구를 하며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남편 김우영도 출셋길을 놓치지 않습니다.

 

 

위의 사진은 중년의 나혜석입니다.

나혜석은 그 후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합니다. 사망원인은 영양실조와 중풍입니다. 추정 나이는 65~66인데요. 실제 나이는 53살이었습니다. 소지품 하나 없었다고 합니다.

 

이상 나혜석 서양화가 독립운동가 작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뛰어나시고 진보적이신 분인데 1번 실수로 너무 가혹하게 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지요. 그 후에 그것을 깨닫고 다시는 안 그러면 만회할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너무 여성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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