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이야기를 알아봅시다

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이야기를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 생일 축하 겸 만주사변 승리 기념 일본의 행사 때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지셔서 많은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가 죽거나 다치게 하셨습니다. 그때 가지고 가신 폭탄은 2개인데요. 하나는 수통처럼 생긴 폭탄이고, 다른 하나가 도시락처럼 생긴 폭탄입니다. 그중 수통처럼 생긴 게 던지기 좋으니까 일본 수뇌부를 향해서는 수통 폭탄을 던지셨고요.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으로 가지고 가셨는데 수통 폭탄을 던진 후 바로 일본 군인에게 잡혀 구타를 당하셔서 자살은 실패하시고 일본에 잡히십니다.

 

 

위의 사진이 거사 전 기념사진을 찍으신 윤봉길 의사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 출생입니다. 본명은 우의(禹儀), 아호는 매헌(梅軒)입니다. 봉길은 별명입니다. 별명이란 게 요즘처럼 장난으로 짓는 명칭이 아니라 본명 이외에 별도로 갖는 이름으로 당시 사용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1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3.1운동을 계기로 일제 식민 교육 거부를 하셔서 학교를 자퇴하셨습니다. 19세 때는 독학으로 한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십니다. 22세 때는 농촌 계몽운동 단체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 계몽 활동을 하십니다. 23세 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嫁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이란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하러 가십니다.

 

저번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에게 찬밥을 대우를 받으면서 계속 접근하여 거사할 수 있었는데요. 윤봉길 의사는 처음에 가서 자기소개하고 금방 김구 선생과 친해지셔서 같이 밥도 먹고, 하급 여관에서 같이 자는 등 빨리 친해지셨다고 합니다.

 

이봉창 의사의 천황 암살 사건이 실패하는데요. 이것을 중국 언론에서 아쉽다는 표현으로 기사를 씁니다. 이것도 원인이 되어 일본은 상하이로 쳐들어가는데요. 상하이 사변이 발발한 것입니다. 거기서 일본이 승리합니다. 그때 날짜가 1932년 4월 정도 됐는데요. 마침 4월 29일이 천장절이라고 해서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일이고 + 상하이 사변 승리 기념행사를 합니다. 이때 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사건 계획을 잡고 시행을 합니다.

 

 

위의 사진이 당시 윤봉길 의사가 가지고 간 도시락 폭탄과 수통 폭탄을 재현한 모습인데요. 딱 봐도 도시락 폭탄보다는 수통 폭탄이 멀리 던지기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수통 폭탄을 일본 수뇌부를 향해 던졌고요.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으로 가지고 갔는데 수통 폭탄을 던지고 바로 붙잡혀 구타를 당하셔서 자살은 실패하십니다. 일본이 행사 때 준비물로 일장기, 도시락, 수통을 미리 공지해서 저렇게 준비한 것입니다.

 

아래는 거사 당일 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사건의 진행 상황 글입니다.

“나는 일본인처럼 꾸미고 경비가 허술한 이른 새벽 훙커우 공원 천장절 축하장에 입장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9시 드디어 행사가 시작됐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개회사가 끝난 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동요했지만, 일본군 수뇌부들은 꼿꼿하게 기립했다. 11시 30분 일본 국가가 울려 퍼졌다. 노래가 끝나는 순간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폭탄을 벗어 단상에 투척했다.”

 

아래가 거사할 때 상황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위의 그림처럼 일본 수뇌부가 있는 단상으로 윤봉길 의사의 폭탄이 날아갔습니다.

 

도시락 폭탄의 무게는 3.5kg이었고 당시 흔히 사용되던 TNT 화약을 사용했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천황 암살 사건 때 폭탄의 위력이 약해서 실패한 것도 있는데요. 그래서 김구 선생이 이번에는 폭탄의 위력과 불발률, 그리고 던지는 법 등을 신경 써서 수정하고 준비하셨습니다.

 

당시 행사장에는 일본 군인만 1만여 명이 있었습니다. 그 군인들을 헤치고 가서 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사건을 성공하게 하신 것입니다.

 

목표였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현장에서 중상을 당하고 1달 뒤 사망하였습니다. 가와바타 일본인 거류민 단장은 현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 시게미쓰 마모루 중국 주재 일본 공사는 다리가 절단됩니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일본 해군 제13함대 사령관은 오른쪽 눈이 실명됩니다.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가 타격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윤봉길 의사 시계와 김구 선생 시계인데요. 저 시계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거사 전 윤봉길 의사가 아래와 같이 김구 선생께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니 제 것과 바꿉시다. 제 시계는 이제 1시간 밖에는 쓸 데가 없습니다.”

그렇게 헤어지면서 김구 선생은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김구 선생님 시계가 전시되어 있고요. 김구 선생 기념관에는 윤봉길 의사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폭탄을 던진 직후 윤봉길 의사가 잡힌 사진인데요. 많이 맞으셔서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윤봉길 의사는 그 후 일본으로 압송되어 가고요. 5월 25일 군법 회의에서 살인 및 폭발물 단속 규칙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총살로 사형이 집행됩니다. 일본은 총살을 잘 안 하는데요. 러일 전쟁 때 2번 하고, 저 때 1번 했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 유해는 처음에 쓰레기 하치장 같은데 버려져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고 했다고 하는데요.

 

해방 후 박열과 같은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유해 발굴을 합니다. 그래서 현재는 효창 공원에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노력을 중국도 보아서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군대를 양성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1919년~1932년 상하이시기

2. 1932년~1940년 이동시기

3. 1940년~1945년 충칭시기입니다.

 

이동시기는 일제의 핍박이 너무 심해서 도망 다니냐 이동을 많이 한 것인데요. 저 이동시기의 시작이 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사건입니다. 아래는 이동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동한 경로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 부통령이었던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가합니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 의사의 덕이요. 우리 임시정부와 윤 의사를 비교해서 이야기하자면 갓 난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 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 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 있는 것이오.”

 

이상 윤봉길 의사 도시락 폭탄 이야기를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저런 조상님들의 은혜로서 지금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니면 일본의 노예로서 2급 시민, 3급 시민으로 지금도 살고 있었겠죠. 조상님들의 은덕이 빛을 더 발하도록 좋은 일 많이 하며 삽시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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