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건국과 멸망에 대해 알아봅시다

발해 건국과 멸망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발해는 옛 고구려 땅에 세워지고 고구려를

잇는 나라인데요.

동북공정으로 중국이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상황입니다.

지리적 특성상 발해 연구가 힘들지만 그나마 알려진

만큼은 알아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당의 영주와 둔화, 천문령 전투를

한 위치입니다.

고구려 멸망후 당은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유민

30.000여호를 당나라 영주나 산둥반도 등으로 이주시킵니다.

주로 힘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이주시켰는데요.

거기에는 대조영과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있었

습니다.

영주에서는 거란족도 같이 살며 감시를 받고

노예처럼 살아갔는데요. 696년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당의 감시망이 무너지자 걸걸중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탈출을 합니다.

 


대조영은 말갈족 피가 섞인 고구려인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의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는 걸걸중상

과 말갈족 추장 등에게 작위까지 내리며 회유를 하는

데요 걸걸중상과 말갈족 추장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에 측천무후는 그들을 공격합니다.

이러 인한 싸움이 천문령 싸움입니다.

거기서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이 승리하게

됩니다. 천문령 전투는 발해 건국의 발판이 됩니다.

 

그리고 둔화라고 적은 지역이 동모산이라고도 하는데

저 지역에서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합니다.(698)

동모산은 영주 반란후 2년에 걸쳐서 간지역입니다.

처음엔 발해라고 안했고요 진국이라고 했습니다.

측천무후가 제후국으로써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다는

서신을 보냈는데요(713) 거기에 따라 나라이름이 발해가

된 것입니다.

발해를 건국하자 고구려 유민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크게 나라를 형성 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 하여 건국했다는 증거로는

위에 보이시는 것처럼 온돌과 기와가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727년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내용은

아래입니다.

무예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위속(풍속)

잇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위에 보이시는 것이 발해 지도와 발해를 건국한

사람인 대조영 초상화입니다.

나라 크기 만으로만 본다면 고구려보다 더 큰 국가를

형성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외교도

하였습니다.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라는 뜻인

해동성국으로도 불리었습니다.

 

당시 당나라가 주변나라의 안정화 등으로 발해를

칠 여력이 되었지만 왕이 양귀비와 노는데 빠져

주변 나라들과 다 화친하는 관계를 맺어서 발해도

외세의 침략 없이 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 중국의 3차 온난기로(600~985) 평균

기온이 1도정도 높아 발해지역의 농업 목축업 등이 발전하기

좋았다고 합니다.

 

발해 멸망은 926년이고요 당시 백두산 폭발은 911~946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요. 시기는 맞습니다.

다만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한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고까지는 말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발해 멸망은 발해 내부 분열이 심해서 외부에 대응

을 할 수 없었을 때 거란족이 쳐들어와 멸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925년에 발해 장군들이 고려에 투항해온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1980년대 이미 중국은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켜버렸고요

러시아도 말갈족이 현재 러시아 소수 민족들이기 때문에

발해가 자기네 나라 역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득공의 발해고라는 책에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라고 최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발해지역에 가면 통제하고 해서

직접 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해 연구도 활발하지 않고 있는데요.

빨리 통일 돼서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발해 건국과 멸망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를

갖았습니다.

한민족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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